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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第一章)

끝나버린 세계의 저편

"세계 전송, 완료"

"......으. 아, 여기도 오랜만이다."

오랜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이 '하얀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새하얀 세상에 놓인 새하얀 의자와 테이블은 언뜻 보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광원이 위에 있는 듯 그림자가 잘 드리워져 있어 그럭저럭 보인다.

"이번엔 1년이었나. 짭짤하네......"

싸구려 나무 의자에서 느낄 수 없는 푹신한 쿠션의 감촉을 엉덩이로 즐기며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다. 내 눈앞에는 2미터 정도 높이의 벽이 아무런 지지대 없이 곧게 세워져 있고, 그 벽에는 수많은 문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엔 짧았던 이 벽도 이제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돌려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 "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늘어선 문은 총 100개. 즉, 이것은 내가 100개의 세계에서 100번의 용사 파티에서 '추방'을 당했음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오점으로밖에 볼 수 없는 숫자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가 내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숫자이기도 하다.

"......당신이 말했잖아.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다른 100개의 세계에서 100개의 용사 파티에 가입해서 100번 추방당하면 된다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돼. 세상을 구하라거나 용사를 도와달라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추방이야? 뭐,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만 말이야."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이쯤에서 말하지만, 나 역시 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평온하고 평범한 용병 생활을 하던 내가 갑자기 이곳으로 소환되었을 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한 권의 하얀 책뿐이었다. 아, 물론 표지가 하얗다고 해서 속이 다 하얗다는 뜻은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해야 할 일...... 즉 아까의 조건이 더 자세하게 적혀 있었고, 눈앞에 있는 벽은 여전히 작았고, 문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 문을 통과하면 나는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그리고 용사 파티를 추방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파티의 일원으로 6개월 이상 함께 행동하거나 일정 이상의 신뢰를 얻어 파티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 후 추방된다'는 조건을 달성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며, 한 번 열린 문은 다시는 열 수 없고 대신 그 옆에 문이 하나 더 생긴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나는 확실히 해냈어. 아마 100년 정도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해냈잖아? 그럼 좀 더 축하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향해 말을 걸어봐도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옆의 거울을 바라보니, 키 170cm에 검은 단발머리에 중후한 체격의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하얀 세상'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이것도 ...... 뭐,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지만........" 

이세계에서 지낼 때, 나는 정상적으로 성장한다. 운동하면 몸에 근육도 생기고, 몸무게도 달라진다. 키가 커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머리카락은 정상적으로 자랐다. 하지만 그런 모든 변화는 내가 이 '하얀 세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리셋되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그 다음에는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니...... 요컨대 나는 항상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이십여 개의 다른 세계를 넘나들며 십여 년의 모험을 이겨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게도, 보통 같으면 이미 늙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을 내 정신은 겉모습과 달리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몸에 마음이 끌려다니는 거라고 할까, 애초에 주변에서 대하는 태도가 계속 스무 살짜리 꼬마로 남아 있어서 성장할 여지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깨달았다는 식의 대사는 하지 않는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성장할 수 있었다거나, 그런 행운의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을 납치해서 의미 없는 강제노동을 백 년씩이나 시키는 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면죄부다.

"............뭐, 됐어. 어쨌든 당신의 지시는 지켰어. 그럼 이번엔 네가 약속을 이행해줘.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 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자. 그것만을 꿈꾸며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고향의 풍경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 이제 곧이다. 집에 가면 뭘 할까? 일단 엄마가 만든 스튜나 먹을까.

마마콘? 알바냐?

이쪽은 100년 만의 방문이야. 그 다음에는 멍청한 놈들의 얼굴을 보고, 그래도 나쁜 짓을 하면 엉덩이를 걷어차버려도 좋다. 그리고 ...... 응? 

고향을 떠올리는 내 시야에 불현듯 테이블 중앙에 놓인 수정 구슬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이세계에서 멋지게 추방당할 때마다 보상으로 나에게 힘을...... 내가 멋대로 '추방 스킬'이라고 부르는 힘을 주는 징조다.

"그래, 마지막 세계를 추방당했으니 추가가 있구나. 이제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수정 구슬에 손을 뻗었다. 만약 이 힘을...... 추방 스킬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분명 이세계로 추방당해 돌아오는 일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또는 가능하다고 해도 추가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어쨌든 원래 나는 특별한 힘도 없는 평범한 용병일 뿐이다.마을과 마을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마수를 사냥하거나 상단의 호위를 맡는 등, 무엇이든 해주는 잡역부. 그런 녀석이 용사 파티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다면, 특별한 힘 한두 가지가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아직 큰 추방 기술이 없던 초창기에는 정말 힘들었다. 진짜 무릎이 꺾일 기세로 짐을 들고 다니고 그랬으니까...... 「......오오」 그때는 아무리 힘들었던 기억도 이렇게 추억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리운...... 아니, 역시 그리운 건 아니구나.

정말 고생한 것은 어디까지나 고생이다. 응. 그래서 나는 싫은 기억을 잊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수정 구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빛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고, 거기서부터 신비한 신의 힘이 내 몸에 스며들어...... 호오?

"어이쿠, 이 녀석 또 대단한 걸 보내왔네. 아니, 먼저 줘." 

그 내용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나는 무심결에 그렇게 말했다. 처음 보는 1회용 능력. 게다가 그 효과가 이렇다니....... ......이건 저거다. 너무 귀해서 끝까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다. '방랑자의 보물창고'를 정리해 보면 그런 식의 회복약 같은 게 수십 개는 있을 것 같다. 다시는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 응?" 

자신의 빈곤함에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문득 나는 가까이서 공간의 흔들림을 느꼈다. 특별히 이상한 힘에 눈을 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얀 세상'에는 나 말고는 움직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변화도 느껴지는 것뿐이다.

"왼쪽, 인가?" 

이에 따르면, 정면에서 옆으로 길게 뻗은 벽의 왼쪽이 위화감의 근원인 것 같다. 보통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 또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문은 항상 오른쪽에 추가되는 것이지, 왼쪽에 늘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왼쪽...... 즉 첫 번째 세계 쪽이다.

그렇다면, 혹시!

"............ 늘고 있다"

급히 벽을 따라 왼쪽으로 달려가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존재했고, 처음 통과한〇〇一의 문 왼편에〇〇〇〇이라는 문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없던, 시작보다 앞선 문 ...... 즉 이것이 바로 내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통하는 문일 것이다.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다.

그래, 분명 돌아갈 수 있다.

이 문만 열면 100년 전 불합리하게 빼앗긴 내가 태어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 어이쿠, 신님? 나는 여기서 100년 정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혹시 원래의 세계에서도 같은 시간만큼 시간이 흘러버렸을까요? 그건 나로서는 정말 곤란한데......" 

인간의 수명은 대략 60년 정도다. 왕이나 귀족처럼 좋은 음식도 먹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권력자라면 칠팔십 세까지 사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고, 위대한 마법사가 마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쉽게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마을 사람들인 것 같았다. 100년만 지나면 남은 생애를 다 보내고 무덤 속에 묻힐 것이다.

"그 부분은, 자, 신이시니까 잘 조정해 주거나...... 해주시는 거죠? 아, 아니면 여기서 마지막 스킬을 쓰라는 건가? 와우,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방금 전에 받은 추방 스킬을 사용하면 아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당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린 100년은 하나님께 바친, 혹은 빼앗긴 100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보상으로 받은 추방 스킬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열심히 일한 보수를 세금으로 전액 가져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불합리하다. 

쾅!

"우왓!"

하늘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새하얀 표지의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거, 처음 왔을 때......? 그럼 읽으라는 건가요?" 

아무래도 신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모양이다. 직접 책을 들고보니, 그 안에는 눈앞의 문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뭐야 뭐야 ...... 번호판 밑에 숫자가? 아, 정말이야. 언제부터?"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문에 붙어 있는 세계번호 표시판 아래에 작은 숫자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방금 전에 책이 떨어졌으니, 아마 이것도 방금 추가된 책이겠지. 노골적인 기이한 현상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이제야 알 수 있는 일이다.

"허, 이게 내가 그 세계를 떠나서 문 안의 세계에서 지나온 시간을 나타내는 거구나. 그렇다는 것은......"

나는 책에서 고개를 들어 00000의 판 아래쪽에 적혀 있는 숫자를 본다. 그러자 거기에도 깔끔하게 0이 줄지어 있고, 다른 숫자는 하나도 없다.

"제로 제로 제로 제로 제로 ...... 이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인가?"

단 1초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건 내가 여기에 납치 감금된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인가?

"돌아갈 수 있다...... 그 날의, 그 장소로! 좋아, 그럼 바로...... 저기, 돌아가지 않겠어? 아!"

열을 내며 문고리를 돌리지만, 마치 열쇠가 걸려 있는 것처럼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 순간 내 머리에 다시 한 번 충격이 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또 책!"

이 '하얀 세상'에서는 왠지 추방 스킬을 전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세계에서는 무적인 나조차도 보통 아프다. 그리고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내 발밑에는 또다시 하얀 책이 놓여 있었다. 마음껏 발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책을 집어 들었더니, 아까의 책보다 이 책이 조금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젠장, 무슨 소리야 ...... 아?"

표지를 열면 책 속이 비어있는 상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금색 열쇠가 들어있었다.

"열쇠? 아니, 열쇠만 있어도 의미가 모르겠어. 설명은...... 이거야?"

원래 내용이 있어야 할 곳은 비어있는데, 다행히 꺼낸 열쇠 아래에는 설명문이 적혀있었다. 이 열쇠는 '완전 추방 기념품'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토록 기념하고 싶지 않은 기념이 존재하는가...... 에서 이게 뭐야?

"음........ '이 열쇠를 사용하면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문을 한 번만 열고 재방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세계로부터의 귀환은 추방이 아닌 그 세계 내의 임의의 문에 이 열쇠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면 열쇠는 사라지고, 동시에 00000세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 눈으로 자신이 걸어온 세계의 결말을 확인해보자'......, 그게 뭐야?" 

전혀 원하지 않는 기회를 강요당하는 나는 무심코 얼굴을 찡그리고 만다.

어, 이게 뭐야? 

그러니까 적당한 세계에 가서 돌아와야 내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뜻인가?

"우와, 너무 싫다. 그냥 집에 보내줘요......" 

목이 말라서 적당한 가게에 들어가서 물을 주문했더니 왠지 모르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정식이 온 느낌이다. 게다가 눈앞에서 계속 웃고 있는 점원이 다 먹을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녀석. 저기, 하나님 아시죠? 요청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강요하는 행위를 사람들은 '참견'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쳇...... 뭐 괜찮아. 이 조건이라면 적당한 세상에 가서 바로 돌아오면 되니까........ 이 되면 어떻게 할까요?" 

만약 귀환 조건이 또다시 추방이었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적당한 문에 열쇠를 꽂아두기만 하면 돌아갈 수 있다면 별 수고 없이 돌아갈 수 있다. 적당한 여관에 방을 잡거나, 최악의 경우 상점의 뒷문 같은 데서 이 열쇠를 쓰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향하는 세계는 어디든 상관없지만...... 문득 시선을 옮긴 곳, 옆에 있는〇〇一세계의 문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생했지" 

첫 번째 문, 첫 번째 세계. 모든 것이 처음이고, 영문도 모른 채 던져진 낯선 세계에서의 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첫 단추부터 '용사 파티에 합류한다'는, 본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만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해야 한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내 실력은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과 크게 다르지 않고, 좋든 나쁘든 보통 그 자체다. 그런 내가 용사 파티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이 세계에 부름을 받았을 때 받은 첫 번째 추방 스킬 <우연이라는 필연> 덕분이다. 이 녀석 덕분에 가장 어려운 '용사를 만나서 동료가 되는 것'이 반쯤 자동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용사의 일행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인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동료......, 아니 동반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나는 용사와 함께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용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술도 없었다. 버려지지 않도록, 버림받지 않도록.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고 실행에 옮겼다. 숙소를 구하고, 소모품을 조달하고, 짐을 들고, 여행지 정보를 수집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다. 솔직히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평소 같았으면 포기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용사 파티에 매달려 결국 추방당할 때까지 1년 반 동안이나 동행할 수 있었다. 그래, 나름대로 잘했다. 추방당하면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안전한 곳에서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신경을 썼지. 뭐, 그마저도 내가 추방되는 계기가 된 사건 때문에 망가졌지만.

"...... 흠."

아까는 힘든 기억은 다 똥이라고 말했지만, 여행의 모든 것을 떠올려보면 조금은 다른 것 같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즐거웠던 일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처음 가본 이세계라 그런지 그곳에서 함께 모험을 했던 동료들은 10년이 지나도 얼굴과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로 애착이 간다.

"그러고 보니 엄청나게 반쪽짜리로 추방당했는데, 그 후 어떻게 된 거지?" 

00001이라고 새겨진 판 아래 새롭게 추가된 숫자를 보니, 내가 추방된 지 10년 정도 지났나 보다. 마왕이 있는 영역 직전쯤에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면 무사히 마왕을 물리치고 전쟁 후의 혼란도 진정되어 평화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네.

"그럼 그 용사님이 왕이 되신 건가? 아니, 왕은 아직 건강해 보였고, 아무리 십 년이 지났다고 해도...... 마왕을 처치한 공적이 있으면...... 어때? 와우, 만나고 싶지 않아...... 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겠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정말 거만한 용사님의 웃음소리다. 강대국의 왕자님이고 용사니까 그럴 만도 하지만, 그런 상대와 함께 여행하는 평범한 남자의 심정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왕자님에 용사라는 건 너무 노린 거 아닌가. 처음 보는 세계였기 때문에 '아, 용사는 그런 거구나'라고 납득했지만, 그 이후 돌아본 세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하하...... 뭐, 괜찮아. 지금은 내가 더 강할 테고, 애초에 내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 얼굴도 마주치지 않겠지. 그래, 모처럼 가는 김에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세상을 관광이라도 해볼까?" 

용사 파티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로, 나는 파티에서 떨어져서 단독으로 활동한 적이 거의 없다. 필연적으로 관광을 할 수 없을 텐데, 이번엔 그런 제약이 없고 내 <방랑자의 보물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다.

"후후후, 용사만두 같은 것도 팔고 있는 걸까? 그 당시 그들이 입었던 장비와 같은 디자인의 갑옷이라든가...... 와, 절대 필요 없는데 좀 갖고 싶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고 용사의 얼굴이 그려진 만두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귀찮았던 이세계 재방문에 대한 의욕이 확 살아난다.

"좋아, 결정됐어! 그럼, 부탁해"

나는〇〇一의 문 앞에 서서 손잡이 아래에 있는 열쇠 구멍에 금색 열쇠를 꽂았다. 참고로 이 열쇠구멍도 아까는 없었을 텐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찰칵'하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열쇠가 돌아가고, 그것을 빼내어 손잡이를 돌리면 ...... "오오, 정말 열렸어" 지금까지는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도 하지 않던 손잡이가 가볍게 돌아가고, 열리지 않던 문이 쉽게 열린다. 그 너머에 있는 빛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잠시 취기가 돌더니 주변 세계가 바뀌고 ...... 나는 어딘가 낯익은 초원에 서 있었다.

"흠흠, 처음과 같은 장소......인가?"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내려와 보니 의외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저쪽에 마을이...... 오, 있었다!

"이 정도면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네. 그럼 느긋하게......, 그 전에 한 번 확인해봐야겠군." 

이세계에 들어선 나는 자신의 추방 스킬을 두 가지 정도 발동해 본다. 거의 무적에 가까운 강력한 물리 결계를 신체 표면에 전개하는 <불패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신체 표면에 마력을 흡수하는 얇은 막을 씌워 사실상 공격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흡마의 책>. 이것을 상시적으로 전개하면 기본적으로 내가 다칠 일은 없다. 혹시나 과거에 이 세계를 방문했을 때 습득하지 않은 추방 스킬을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문제없을 것 같다.

"수비는 완벽하다고. 그리고 무기는...... 적당하니 괜찮아. 어차피 큰 마수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방랑자의 보물창고>에 손을 집어넣고, 그 안에서 강철의 검 한 자루를 꺼냈다. 더 강력한 무기도 있지만, 마왕이 쓰러진 세계, 그것도 큰 마을 근처에 강한 마수가 있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뿔토끼...... 이름 그대로 뿔 달린 토끼...... 정도는 만날 수 있겠지만, 일단 마수라고는 하지만 저런 놈에게 당하는 건 초보자들뿐이다.

<불패의 성벽>을 펼친 내 배를 들이받는다면 오히려 토끼의 뿔이 부러질 것 같다.

"그래 그래, 역시 이런 기본 무기는 손에 익은 것 같네. 모처럼의 관광이니 대장간을 빌릴 수 있다면 기념으로 한 번 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이 검 자체는 시중에서 파는 물건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대장장이도 할 수 있다. 다만 용사 파티로 여행하는 동안에는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직접 만든 무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해보고 싶네. 실용성을 추구한다면 추방 스킬에 의존하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이라면 자신의 힘만으로 검을 휘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음, 왠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네. 받은 순간에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의외로 센스 있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응?" 

얼굴도 모르는 신의 걱정, 그에 대한 평가에 손바닥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니 내 눈에 큰 마을의 그림자가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심상치 않다.

"마을의 외벽이 무너졌다고? 어, 거짓말이지! 설마 마수의 습격?" 

내가 급하게 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추방 스킬 <추풍의 발>을 발동하니 멀리 보였던 마을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다시 보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이 절반 이상 무너져 있고, 거기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도 상당 부분 무너져 있다.

"아니 아니, 거짓말이지!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이렇게 망가져 있다니...... 게다가 이 정도면 어제 오늘 망가진 것 같지 않잖아?" 

문지기가 없는 마을 문을 그대로 통과한 나는 잔해가 된 건물 안을 살펴본다. 간신히 남아 있는 가구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 이렇게 된 지 최소 1년은 지났을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마왕은 죽었을 텐데...... 설마 인간들끼리 전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는 그것이 가장 높다. 인류 공통의 위협이었던 마왕이 쓰러지면서 군사력에 여유가 생기고, 그 결과 강대국끼리 전쟁을 시작한다는...... 다소 황당한 상상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야, 너!"

하고 자신의 상상에 빠져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불쑥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해의 그림자 속에서 큰 가방을 짊어지고 누더기 옷을 입은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낸다.

"너, 이런 데서 뭐하는 거야? 여긴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그건 친절하게도......, 난 잔해를 줍으러 온 게 아니야! 그보다 말해봐, 왜 이 마을이 이런 상태가 된 거지?"

"어? 무슨 소리야? 이 마을이 마왕군에게 공격받아 멸망한 게 벌써 2년 전의 일이잖아?"

"............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에게 나는 무심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공격받아 멸망했다? 마왕군에게? 라고......

"어, 마왕군! 마왕군이 아직 건재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왕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 뭐야, 너 그런 것도 모르냐, 도대체 어느 시골 출신이야?"

"계속? 잔당이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속 괴롭히고 있는......!? 왜 그렇게까지? 용사는! 용사는 어떻게 된 거야!"

"용사?"

"용사다! 용사 알렉시스! 10년 전 마왕을 쓰러뜨리기 직전까지 갔던 이 나라의 왕자, 용사 알렉시스!"

"아, 그거 말인가. 용사라면 5년 전에 죽었지?"

"죽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용사가, 그 잘난 척하는 왕자님이 죽었다 ......?

"왜...... 왜 죽은 거야?"

"그런 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그저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을 뿐이야."

"그럼 동료는! 용사 파티는 두 명만 남았잖아! 그들은!"

"글쎄요. 같이 죽은 거 아니야? 적어도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그런................."

너무 충격이 커서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웃는 알렉시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파르르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린다.

"어이, 너 괜찮아? 어이!"

"……………………"

그 후 몇 번이나 아저씨가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내 의식은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하지만 내 쪽은 달랐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죽었...... 죽었다고? 다들 죽었다고............!?"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100명이 넘는 용사 파티 중 단 하나. 100년 동안 활동한 가운데, 불과 1년 6개월. 나름대로 친해졌지만,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었던...... 말하자면 조금은 친숙한 술집 종업원 정도의 사이였을 법한 상대방의 죽음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곤조는...... 티아가 죽었다............?" 

때론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던 옛 동료들의 이름과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알렉시스의 얼굴, 근육을 과시하는 대머리 무승 곤조의 얼굴, 뭔가 언니처럼 구는 티아의 비취빛 눈동자가 내 눈꺼풀 뒤에서 떠나지 않는다. 차라리 누군지 모를 정도로 잊어버렸다면 이런 기분은 없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하, 하하하...... 뭐야, 내가 그렇게 정이 많은 놈이었어? 나를 추방한 첫 번째'전'동료들이잖아? 그런데 왜 이런 ......"

예를 들어 이것이 100년 후이고, 모두가 노쇠해서...... 아니, 티아는 엘프였으니 아직 살아있을 텐데........ ...죽었다면 분명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잡동사니는 먼 과거의 일이다. 무덤에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라도 바치고 합장하면, 조금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정도에서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불합리한 결말은 내가 추방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의 내가 그대로 용사 파티에 남았다면 알렉시스 일행이 전멸하는 위협에 맞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이 세상의 결말이다. 그 열쇠의 설명에 적혀있던, 지켜봐야 할 운명의 귀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 세상으로 돌아온 외부인에 불과한 나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안타깝다'는 애도의 뜻 하나라도 표하면 바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러면 내게는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알고 있어. 그런 걸 알고 있을 텐데...... 내 마음이, 내 영혼이. 그런 걸로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아까부터 계속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나타나라,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

오른손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 위에 주먹을 두 번 쥔 주먹보다 두 배 정도 큰 십자형 금속 틀이 나타나더니, 찾아야 할 무언가를 찾아 빈 공간의 중앙에 반짝반짝 빛이 깜빡거린다.

"찾는 것은 ...... 용사 알렉시스."

그 말에 맞춰 칼라포였던 테두리 안에 하얀 안개가 나타나고, 그곳에 알렉시스의 위풍당당한 얼굴이 휙 나타나...... 하지만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즉, 수색 대상인 알렉시스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큿.. 그러면 용사 알렉시스의............ 죽은 장소는?"

입술을 깨물며 나는 새로운 지정을 입력했다. 그러자 텅 빈 금속 틀 안에 보이지 않던 장소가 떠오르고, 이어 모인 연무가 화살촉 모양으로 변해 목적지 위치를 가리킨다.

"곤조............ 무승 곤조, 죽은 곳은?" 

대상을 바꾸어 다시 묻는다. 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곳은 방금 전과 같은 풍경이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죽은 것 같다.

(그러니까 역시 마족과의 전투에서 죽었구나...... 그러면......) 

만약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죽었다면,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는 것은 용사 일행이 그 장소에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 무의미하게 확인해서 괜한 고통만 더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의문을 떨쳐버리고, 나는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에게 세 번 묻는다.

"티아의 ...... 루나리 티아가 죽은 곳은?"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 속에는 반짝이는 엘프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안의 안개와 결별하기 위해 그 후의 변화를 지켜보던 나는 예상과 달리 하얀 안개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어?" 어리둥절함이 사라진다.

그것은 수색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티아는 살아있다는 뜻인가?

"티아의...... 루나리 티아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그렇게 묻자, 다행히도 나의 추방 스킬은 당황하지 않고 앞의 두 가지와는 다른 풍경을 비춘다. 깊은 숲, 작은 집...... 그 풍경이 화살촉 모양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지시된 방향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하아..... 하아..... 하아......"

들뜬 마음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내 몸에 피로가 쌓여가지만, 그런 것은 나를 몰아붙이는 격정에 비하면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전망이 좋은 평지는 <추풍의 다리>로 달려서 나무가 우거진 깊은 숲으로 들어가면 새롭게 추방 스킬 <불가지의 거울면>을 발동한다. 이 녀석은 한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고 한 번 사용하면 하루 종일 발동할 수 없지만, 발동 중에는 내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고 이 세계에서 모든 간섭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강력한 추방 스킬이다.
물론 강력하다고 해서 완벽한 만능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든 두꺼운 성벽이든 상관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반면, 내 쪽에서는 그들에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종이 한 장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또한 일정 이상의 질량을 가지고 이 세상에 뿌리내린 것...... 즉, 바다나 땅 같은 것들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충돌하게 된다. 덕분에 땅바닥에 거꾸로 떨어지지 않고, 그 성질을 이용해 물 위를 달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하아..... 하아..... 하아......"

평지를 달리고 나무를 뚫고 일사불란하게 전진한다. 도중에 <불가지의 거울면> 효과가 사라져 속도가 약간 떨어졌지만, 그래도 내 이동 속도는 군마는커녕 비룡보다 빠르다.

달려, 달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비경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정말 이런 곳에 티아가 살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하아...... 여기, 여긴가…………?"

내 손 위에서 역할을 마친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이 사라진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공예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낡은 나무 오두막집으로, 그 주변에는 최근 사람이 드나들었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다.

"스으읍.... 하아.. 좋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나는 먼저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티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전력으로 달려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티아 입장에서는 나는 용사 파티에서 쫓겨난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 놈이 갑자기 집에 찾아온다면, 보통은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다.

"아차, 기념품이라도 가져갈 걸 그랬나?"

나는 <방랑자의 보물창고>에 손을 넣어, 좋은 물건이 들어 있지 않은지 살펴본다.

하지만 무기와 회복약은 얼마든지 나오는 반면, 10년 만에 만나는 지인에게 줄 만한 물건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방랑자의 보물창고>는 용량은 커도 내부에서 시간이 멈추는 등의 편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필연적으로 꽃이나 식료품 같은 것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쳇, 좀 더 이렇게 기발한 무언가가 ...... 오?"

그런 와중에 내 손에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마지막 세상을 떠나던 날, 술집에 가기 전 들른 시장에서 산 과일이다.

"좋은 게 있네! 좋아, 이것으로 가자" 

티아는 달콤한 과일 같은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뭐,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날 이걸 산 나의 선견지명을 최대한 칭찬해주고 싶다.

"이제부터 맨손으로 들고 다니는 건...... 이것으로 충분해"

추가로 적당한 바구니를 하나 더 꺼내어 그 안에 방금 전의 감귤 다섯 개를 모두 담아 준비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숨을 고른 후 집 앞의 문을 두드렸다. 

콩콩

"……………………?"

콩콩콩.

"……………………으응?"

몇 번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기척이 없다.

(설마 외박!? 라고 하면,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내가 찾아온 사람이 나로 알려져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된 나를 티아가 알 리가 없지 않겠는가. 몇 번을 더 두드렸지만, 역시 안에 있는 사람의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누구 없나요~?"

노크가 안 된다고 하면, 나는 비교적 큰 목소리로 안쪽을 불러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나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음…………"

만약 이곳이 마을 근처라면, 다시 날짜를 변경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오면 나중에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솔직히 하기 싫다. 그렇다고 해서 더 큰 소리로 외쳐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방음벽을 치지 않았다면 방금 전의 외침을 듣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들어갈까?"

내 머릿속에 악마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 10년 만에 상대방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나를 기억하고 있든 기억하지 못하든 끔찍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잖아? 아니,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지......

'티아? 루나리 티아씨? 나야, 10년 전에 함께 용사 파티로 여행을 했던 에드야!"

마지막 발악으로 나는 큰 소리로 티아를 부르며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나는 마침내 악마의 결단을 내렸다.

"......좋아, 들어간다"

설령 격렬한 경멸을 받더라도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으니, 최악의 경우 무단침입 범죄자로 수배되더라도 세상을 떠나면 상관없다. 나는 부드럽게 문에 손을 얹고 손잡이를 돌린다. 그러자 열쇠가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고 깜짝 놀라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이곳에 와서 왠지 모르게 나는 작은 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희미한 실내를 둘러보면 생활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티어인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다른 사람의 집이라면 도망치자......) 

내 <실종자 광기의 나침반>이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지만, 이번이 그 첫 번째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마음가짐을 가다듬으면서도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면서 여러 개의 방 문 중 하나에 손을 얹었다.

"여기는......"

열린 것은 침실의 문이었다. 방의 가장자리에는 침대가 있는데,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실루엣으로 보아 누군가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지금은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다. 즉, 이 집의 주인은 낮이 지나도록 능청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 

무반응의 원인이 설마 숙면 때문일 거라는 사실에 나는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가볍게 이불을 걷자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엘프 여인의 편안한 잠자리가......

"……………………쿠울."

"일어나, 이 멍청아!"

"아욱?!"

나는 자고 있는 티아의 이마에 딱밤을 살짝 먹여주었다. 그러자 티아의 몸이 벌떡 일어나고, 곧이어 눈이 번쩍 뜨인다.

"후에!? 누, 누구!?"

"아, 에-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자고 있는 여자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딱밤을 먹인다든가 하는 수상한 행각이 벌어진다. 즉석에서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지둥 시선을 돌리는 나에게, 티아는 그 옥빛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거짓말.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야, 꿈이 아닌 것 같은데 ...... 오, 오랜만이야?"

"에드!"

가뿐히 일어난 티아가 내 목에 그대로 안기며 달려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생각도 몸도 굳어지고 있을 때, 티아가 재빨리 말을 건넨다.

"에드, 에드다. 정말 에드가 있구나...... 설마 살아서 재회할 수 있을 줄이야......!"

"잠깐, 진정해! 진정해! 일단 떨어져서......, 아니, 살아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요?"

나는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곳에 내던져진 것은 아니다. 얇은 티아의 몸을 여러 가지로 잡아당기며 묻자, 티아는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무슨 소리야! 자신의 흔적을 철저하게 숨긴 건 에드 쪽이었잖아! 우리랑 같이 여행했으니까 에드도 꽤나 유명할 텐데, 어느 마을에 가도 추방된 후의 에드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우리를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혹시나 어딘가에서 이미 죽어버린 건 아닌지 궁금했어! ......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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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 미안하네" 

용사 파티에서 추방된 지 10분 후, 나는 그 '하얀 세상'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쪽 세계에 그 이후의 행보가 있을 리가 없고, 그 사정을 모르면 확실히 죽었거나 다시는 관여하지 않기 위해 이름을 버리고 활동 중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그렇...... 지?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했다고 하면 여러모로 체면이 서지 않으니 티아 말대로 이름을 바꿔서 먼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래, 그랬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적당한 이유를 말하는 나에게 티아가 눈물을 흘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 앞에서 내 안의 죄책감이 엄청나게 커졌지만, 그렇다고 내가 추방당한 쪽이니까 내가 사과하는 것도 뭔가 그렇다. 쳇, 모든 것을 추방이라는 방법으로만 세상을 탈출할 수 있게 만든 놈의 탓이다. 차라리 '하얀 세상'으로 돌아가서 방에 낙서라도 해줄까? 아니, 그 세계에서는 추방 스킬을 쓸 수 없으니 펜 같은 건 못 가져가지만. 이제 '추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제야 말이지. 10년 만에 돌아온 내가 사실 이런 사정이 있었어~라고 이야기하면 티아를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겠지.

"아, 맞다. 지금 와서야 말하지만, 이건 기념품이야." 

나는 티아에게 껴안길 때 떨어뜨린 바구니를 주워 바닥에 굴러다니는 감귤을 주워 다시 채운다. 그렇게 바구니를 내밀자, 티아가 그 안에 들어있는 노란 과일을 손에 들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이게 오렌의 열매야? 기쁘지만, 이 집에는 목욕탕이 없잖아?"

“목욕? 일부러 목욕탕에서 먹는 거야?"

"먹는다고!?"

내 말에 티아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도무지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얼굴을 맞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티아 쪽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건 오렌의 열매라고 하는데, 껍질에 칼집을 내어 목욕할 때 물에 띄우면 아주 좋은 향이 나고 피부도 매끈해져요. 하지만 열매 부분은 아주 신맛이 강해서 이걸 먹으면 입안이 이렇게 으~! 하는 거라고요." 

말하자 티아가 신랄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민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아니, 이건 그냥 평범하게 달고 맛있는 거잖아?"

"거짓말! 나를 속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먹어봐. 정말 맛있으니까!"

"정말?" 

내 말에 티아가 노골적으로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나는 이 열매를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신맛이 강하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 맞다.
애초에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설령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도 이것은 오렌의 열매가 아니다. 그렇다면 맛과 용도가 다른 것은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지금 벗겨줄 테니 속았다고 생각하고 먹어볼래? 만약 맛없으면...... 아, 뭐라도 부탁 하나 들어줄게."

"에? 약속한거다?"

"오, 오우. 너무 무모한 소리 하지마...... 아니, 정말 맛있을 텐데......." 

나는 허리춤의 가방에서 칼을 꺼내 오렌의 열매처럼 보이는 두꺼운 껍질에 칼집을 낸다. 그러자 감귤류의 좋은 향기가 방안에 퍼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열매를 한 움큼 떼어 티아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티아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다보다가 입에 쏙 집어넣었다......

"스읍!?"

"어, 거짓말!" 

얼굴을 찡그리는 티아에게 나는 급히 껍질을 벗겨낸 오렌지를 한 송이씩 떼어 먹는다. 물론 씨앗이 생길 정도로 너무 익으면 신맛이 난다던데, 이건 달콤할 것 같은데....... 응?

"뭐야? 적당히 달달한 거 아니야?"

"후훗! 야~ 속았어~!"

"뭐!?" 

당황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티아가 빙긋이 웃는다. 놀리는 얼굴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얄밉...... 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쳐 어른이 된 나는 이런 일로 화를 내지는 않는다.

"하하하, 티아씨. 그건 좀 어른스럽지 못하지 않나요?" 

비록 관자놀이가 떨리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뺨을 툭툭 건드려도 화내지 않는다. 입을 쭈욱 당겨도......

"아까부터 뭐야!"

"후훗, 이 정도면 괜찮잖아. 옛날에도 이렇게 놀아주곤 했잖아."

"일방적으로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나는 귀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난치지 마! 어린 청소년을 놀리고 있잖아! 당시 내가 얼마나......"

"얼마나,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지만"

티아는 정말이지 아주 친근한 여자였다. 여자를 사귄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지나치게 부담 없이 몸을 만지거나 무방비 상태로 숨을 쉴 수 있는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어 오는 것은 정말 긴장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티아는 평균 수명이 300년이나 되는 엘프다. 그냥보면 나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어도 그 나이는 100세 이상이었을 테고, 저쪽에서 보면 나는 어린아이, 잘해야 손이 많이 가는 동생 정도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어른들이 아이를 놀리며 놀아준 것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이상한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제했고, 실제로 결국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좋지 않은 형태로 증명되기도 했다.

"하하, 10년이 지나도 티아는 변함이 없네. 역시 나를 용사 파티에서 추방시킨 여자였어."

"그...... 그것, 은............" 

약간의 반격의 의미로 가벼운 어조로 그런 비꼬는 말을 내뱉은 나에게, 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어이쿠, 이건 좀 과한가? 그리운 대화에 마음까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지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은 나도 본의가 아니다.

"아니, 미안해. 방금 건은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

"아, 아니, 아니야. 나는 티아를 원망한 적도 없고, 그 일을 끌어안고 있지도 않아. 확실히 그 당시 나는 나약해서 용사 파티의 발목을 잡았고, 그 원인도...... 뭐, 그래. 일단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 미안해"

"'아니, 아니, 아니! 아니니까! 정말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어렵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던 티아의 표정이 다시 흐려진다. 

쳇, 뭐 하는 거야, 난 바보인가?

10년 만에 만난 동료를 울리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에드는 왜 여기에 온 거지? 나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런 내 속마음 따위는 알 수 없는 티아가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그 질문의 의미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비난? 왜?"

"......나, 나만 살아남았으니까"

"읏…………"

꽉,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난 과거가 현실에 떨어진 그림자를 더욱 짙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용사 파티에서 탈락한 생존자라고? 만약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도 같은 죄가 있어."

"그건--"

“그런거라고! 그래서 그런 짓을 할 생각도 없고, 그런 짓을 하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야. 그냥 ......"

"그냥?"

"......이야기 좀 들려줄래? 내가 빠져나간 후, 용사 파티에 무슨 일이 있었어? 왜 용사님은...... 알렉시스는 죽었어?" 

이곳에 온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꼽으라면 진실을 알기 위해서다. 조용히 묻는 나에게 티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인다. 동료가 죽었을 때의 이야기는...... 더군다나 자신만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 외부인이든 외부인이든, 잠시나마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나에게는 그것을 알 권리와 의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

"역시 괴로울까? 그렇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아니, 괜찮아. 지금 말해요...... 지금 말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여기가 너무 좁으니까 저쪽 방으로 가도 될까? 차도 끓일 수 있고...... 그리고 옷 갈아입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래. 그렇구나. 그렇구나."

다소 말이 길어졌지만, 이곳은 침실이고 티아가 입고 있는 것은 반짝이는 분홍색 파자마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집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품처럼 보이지만, 뛰어난 정령술사 티아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 옷차림에 걸맞는 명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잠옷은 잠옷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 앞에서 입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럼 나는 저쪽에서 기다릴게"

"응. "네, 옷 갈아입고 바로 갈게요." 

침실을 나와 거실에 있던 4인용 테이블의 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익숙한 연초록색 여행복을 입은 티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금 먹은 오렌의 열매 같은 색의 긴 머리는 금빛처럼 눈부시지 않고 따뜻한 느낌을 주며, 16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비해 날씬한 몸매는...... 응? 전보다 더 가늘어진 느낌이 드는데. 솔직히 너무 마른 것 같긴 하지만, 여자에게 체형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왜 여행복? 혹시 경계하고 있는 건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지만, 티아는 큰 옥색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에 앉은 나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잠깐만요. 그럼 차를 끓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으음으음. 잘 부탁드립니다."

"뭐야? 후훗" 

허풍을 떨며 큰소리를 치는 나에게 티아가 킥킥거리며 웃으며 조리실 쪽으로 이동한다. 그 등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 분량의 백자 차 세트가 놓여 있고, 눈앞에 놓인 컵에는 향긋한 향을 내는 홍차가 잔뜩 담겨 있었다.

"네, 드세요"

"오, 고마워요...... 저기? 이 차는 ......?"

"어머, 기억하고 있어? 장하다 장하다"

"무우.."

그것은 내가 처음 티아에 넣어준 것과 같은 홍차다. 일부러 몸을 숙여 내 머리를 쓰다듬는 티아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눈빛을 보내자, 다시 앉은 티아가 자신의 컵에 입을...... 대고 작게 숨을 내쉰다.

"그럼, 말해줄게. 에드 없어진 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드엔딩이 확정된, 아무도 얻지 못하는 옛 이야기. 손바닥의 온기와는 달리 차갑게 식어가는 실내 공기에 티아의 말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에드가 떠나자마자 우리는 에드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어.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어."

"에? 어째서?"

예상치 못한 티아의 말에 나는 무심코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스스로도 말하지만, 당시 내 능력은 평범함의 극치였다. 나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짐꾼은 팔과 체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정도의 인재 모집이 잘 안될 줄이야......?

"자, 에드가 빠져나간 건 마왕군과의 싸움의 최전선 근처였잖아?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짐꾼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우리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아아, 그런 이유로......."

쓴웃음을 짓는 티아의 얼굴에 나는 그 광경을 상상하며 납득했다. 그래, 사람이 모이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만 모이게 된 거구나. 사실 나는 1년 반 동안 알렉시스 일행과 함께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용사 파티에 합류하기에는 너무 나약한 내가 그래도 동행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같이 여는 동료가 아닌, 보수를 받고 일하는 고용인의 입장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거물급 인사들과 이야기하거나 호화로운 파티에 참석할 때 나는 기본 숙소를 지키고 있었고, 용사 파티를 위한 포상금이나 특권 같은 것은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딱히 유명해지고 싶어서 용사단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곳에 불려가서 허둥지둥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을 테니 그 대우에 불만은 없었지만...... 확실히 최전방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짐꾼을 계기로 자신의 힘을 보여줘서 용사단의 일원이 되는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다...... 알렉시스 일행이 원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것은 순수한 짐꾼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자기주장을 하면 곤란하잖아. 우리가 전력으로 싸울 수 있도록 누군가가 짐을 들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면 당연히 짐이 방해가 되잖아? 그러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최소한의 일조차도 싫어하고, 때로는 억지로 전투에 끼어드는 사람까지 생겨서...... 여섯 명 정도 고용했는데, 대부분 3개월도 못 버티고 알렉시스가 화를 내며 쫓아냈어."

"어어...."

얼굴은 차분하지만 속으로는 속이 터져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알렉시스의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된다. 오해한 놈들에게 동정의 여지는 없지만, 솔직히 그 자리에 내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그 근처에서 모집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일단 큰 마을로 철수하고 전문 짐꾼을 고용하기로 했어......"

"응? 그 말인즉슨 그것도 안 되었던 건가? 왜?"

"그래...... 자, 에드는 정말 열심히, 정말 많은 일을 해줬잖아? 그래서 우리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 어느날 알렉시스가 고용한 사람에게 요구했더니 '내 일은 짐을 나르는 것이지 집안일이나 몸가짐을 돌보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어. 그런 걸 원한다면 자신과 별도로 전용 하인이나 잡일을 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고 받아쳤어. 그래서 알렉시스가 격분해서 그 기세로 그 사람을 쫓아내 버렸어."

"에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 티아에게 나도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 나는 합류한 직후부터 온갖 잡일을 앞장서서 해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용사 파티에 동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 파티를 꼭 따라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행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 동기도 사라졌지만, 추방당하면 10분 만에 '하얀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추방될 수 있도록 조정하기 위해 목적은 달라졌지만 이후에도 최선을 다해 봉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전의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곳을 여행하고, 내 능력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모험을 많이 하면서...... 어느새 나는 추방당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눈을 돌릴 정도로 전력을 다해 모두를 응원하고 있었다.

실력은 떨어지지만 동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나와, 실력이 뛰어나지만 받은 보수만큼만 일을 하는 녀석.
어느 쪽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존재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아니, 하지만 그 정도는 알렉시스도 알잖아? 용사 파티에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럼 다른 사람을 잡일꾼으로 고용하면 됐잖아." 

그런 나의 지적에 티아가 가볍게 웃는다.

“그렇네. 지금 같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만 그때는 나도 알렉시스도 그 전에 고용한 사람들 때문에 조금 방황하고 있었어요. 곤조는 타일렀지만 알렉시스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것 같았어......"

"아-......"

그 말에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건 알렉시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짜증이 나서 실수할 때도 있겠지만, 용감하고 왕자의 입장이라면 고개를 숙이는 것도 쉽지 않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면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더니, 짐을 나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일단 그 사람한테는 우회적으로 사과를 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될 것 같다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어. 알렉시스가 지위를 이용해 계약 외의 일을 억지로 시킨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서 더 이상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어. 급하게 정정을 시도했고, 여기서 드디어 알렉시스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겠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았어. 아니, 정확히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권력으로 억지로 화해시켰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빠졌어......"

"아, 그거 안 좋은 방법이네" 

그런 상황에서 사과를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알렉시스의 본심이 어떻든 간에, 그런 귀찮은 일을 끝까지 관여하는 고용주는 보수를 두 배로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다.

"우와, 에드, 가차없이 말하네...... 하지만 그 말이 맞아. 짐꾼은 꼭 필요하지만, 짐꾼을 맡아줄 사람은 더 이상 없었어. 게다가 나나 곤조가 큰 부상을 입었다든가 하는 건 둘째 치고, 말하자면 짐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언제까지나 용사 파티가 움직이지 않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어. 정말 난감해져서 차라리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끼리 나눠서 짐을 들고 가자고 얘기했더니 ......라는 분이 연락이 왔어. 자신이라면 어떤 짐이라도 들고, 잡일도 기꺼이 할 테니 꼭 같이 일하자고. 그러니 꼭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하더라고. 그건 우리한테는 어쨌든 좋은 이야기였어. 그래서 알렉시스는 흔쾌히 수락했고, 저와 곤조도 환영했어요. 그렇게 드디어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된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모험을 계속 이어나갔어 ......하지만 ............ ............"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자 티아의 표정이 괴로운 듯 일그러진다. 얇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에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마침내 마경을 빠져나왔어. 깊은 숲을 지나 드디어 도착한 마왕의 영역. 그곳은 끝없이 펼쳐진 평원...... 그리고 그 평원을 가득 채울 기세로 마왕군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마경을 통과하는 몇 달 동안 마왕군에게 완전히 숨어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상황도 예상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 짐꾼이 도망쳐 버렸어."

".........하? 도망갔다고?"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그대로 되묻고 말았다.

아니, 아니, 어?

"도망쳤다고 ...... 어떻게? 마경을 빠져나온 거지?" 

짐꾼이 대지를 가득 채운 마왕의 군대에 겁에 질려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잘 안다.

하지만, 그야 말로 용사 일행이 몇 달에 걸쳐서 밟고 지나간 곳을 평범한 짐꾼이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나의 의문에 티아가 곤혹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전이결정을 알지?"

"아. 미리 위치를 등록해 두면, 깨뜨렸을 때 그곳으로 전이할 수 있다는 것?"

"그래요. 그걸 우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탈출 수단으로 여러 명 분량을 준비해 두었는데, 그건 깨지면 스스로 발동하기 때문에 전투 중에는 들고 다니지 않잖아? 그래서 그 사람한테 전부 다 맡겨놨어......"

"............ 어, 거짓말이지? 설마!"

"응. 그 사람이 전이 수정을 사용했어. 우리가 준비한 회복약과 마도구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푸른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걸 봤을 때, 솔직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어."

"뭐야, 그건 ......!?" 

슬픈 표정을 짓는 티아의 모습에 내 안에서 어쩔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 몫을 쓰고 도망치면 그래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료의 몫까지 모두 가져가면? 이미 전투가 시작됐다면 모를까, 아직은 먼 거리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잖아? 일반인이라면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알렉시스 일행과 함께 마의 경계를 넘나들었겠지? 그런 놈이 왜, 왜 ......!??

"그래서 ............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름도 모르는 나의 후임자에게 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마음을 바꿔 묻는 나에게 티아는 시린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겠어? 어떻게 할 수 없었어. 무기나 방어구는 그렇다 치고, 입고 있던 건 비상용 회복약 몇 개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수천 명에 달하는 마왕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급히 마계로 도망쳐 숨어 한동안 싸웠지만 ...... 결국 마계에 서식하는 마수들에게도 쫓겨나 처음 나왔던 초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거기서 죽음을 각오하고, 이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특대형 정령마법을 ...... 생각하던 찰나에 알렉시스가 ......"

티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먹을 꽉 쥔 작은 주먹과 함께 목소리가 떨리면서도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알렉시스가 항상 입던 갑옷에는 사실 가슴 안쪽에 비밀의 전이 결정이 숨겨져 있었어. 만약 그것이 파손되는 일이 생기면 동료를 버리고 자신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 나나 곤조와 달리 알렉시스는 신이 선택한 용사이자 대국의 왕자님...... 정말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만약 그때 알렉시스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나는 물론 곤조도 알렉시스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 같아. 오히려 용감하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안도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알렉시스는 그것을 빼서 나에게 사용했어! '용사인 내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다니, 그렇게 못난 짓을 할 수는 없지 않겠어? 라고! 너덜너덜한 갑옷 틈새로 전이 결정체를 빼내어 내게 억지로 쥐게 한 뒤, 그대로 검으로 내리쳐서 ......!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겨를이 없었어! 알렉시스가 평소처럼 여유로운 위풍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 나는, 나는 ......!"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흘리며 티아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심정을 토해낸다. 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 몸을 던진 티아가 어떤 심정으로 이 말을 내뱉었을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읏……우으으…………우와아아아!!!」 

마침내 테이블에 엎드려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티아. 나는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와 그런 티아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가슴에 품은 슬픔은 끝이 없지만 흘릴 수 있는 눈물에는 한계가 있다. 조금씩 목소리가 가라앉은 티아가 겨우 고개를 들자, 새빨갛게 부어오른 두 눈을 비비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 진정됐어?"

"응. 미안해, 에드. 고마워요." 

콧물을 킁킁거리며 코를 훌쩍이는 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다. 그 얼굴이 너무 아프지만, 그래도 티아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내가 나온 곳은 노틀랜드 성에 있는 비밀의 방이었어.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곳에 정신이 혼미한 내가 혼자 나타난 것이 큰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원래 알렉시스가 나오는 곳에 다른 사람이 왔으니까. 왕자는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나타난 거야? 혹시 알렉시스의 전이결정을 빼앗아 쓴 거 아니냐며 무서운 얼굴로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 조금 진정이 되니까 왕이 직접 찾아왔어요. 그래서 왕에게 나는 그간의 일을 이야기 ...... 했더니 왕이 엄청 무서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용사 일행은 마경을 넘어가면서 전멸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처음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왕의 슬픈 표정을 보니 그럴 힘도 없어졌어요."

"그렇구나 ...... 뭐, 그래. 합리적인 판단이겠지." 

알렉시스가 취한 마지막 행동은 그의 입장을 고려하면 완벽한 낙제점이다. 아까 티아 본인도 말했지만, 용사 파티에서 대체할 수 없는 건 용사 본인인 알렉시스뿐이고, 다른 동료들은 돈과 시간만 투자하면 일단은 어떻게든 된다. 그러면 재결성한 용사 파티와 함께 다시 한 번 토벌에 나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동료인 ...... 티아를 도왔다.

그것은 세계의 미래와 동료의 생명, 혹은 자신의 자존심을 저울질하여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권력을 가진 자로서 절대 선택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다. 알렉시스가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스는 그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동료를 돕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용사로서 가장 못났지만 누구보다 용사다운 행동을 몸소 보여준 알렉시스를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바보라고 비웃을 수는 없다. 물론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알렉시스와 함께 여행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세간의 평가는 아마 다를 것이다. 물론 영웅적인 행동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알렉시스를 비난하고, 그런 알렉시스에게 도움을 받은 티아를 정의와 정론을 내세워 몰아붙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강한 자책감에 휩싸여 있었을 당시 티아가 돌을 던지는 이들의 악의를 접했다면 ......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의 마지막 뜻을 존중하는 ......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의 그 판단이 있었기에 티아는 어떻게든 망가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응? 그럼 이런 외딴 곳에 혼자 살고 있는 건 ......"

"그래.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을 숨기려고. 특히 나는 엘프잖아? 5년, 10년이 지나면 외모가 전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사람이 오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어. 세 번이나 있었다는 원정군에도 참가하지 못했고요 ......"

"원정군?"

"어라? 몰랐어? 알렉시스를 구출하기 위해 노틀란드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세 번이나 마계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어. 하지만 마경은 원래 숫자에 의존해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하지만 용사는 더 이상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고 ...... 결국 단 한 번도 원정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곳에 너무 많은 전력을 소모한 탓에 각지의 마왕군과의 전투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했지 ...... 그게 지금이잖아? 나조차도 아는데, 왜 평범하게 살던 에드가 그걸 모르겠어!"

"어! 아, 아니, 그건 ...... 저거다. 먼 나라에서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고 했지? 그곳은 정말 시골의 작은 마을이었어. 솔직히 마을 안에서만 거의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정보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 그래, 그래서 내 정보도 외부로 흘러나오지 않았던 거지."

"그렇구나........"

"그래, ...... 확실히 그렇게 정보가 고립되어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에드를 찾지 못한 것도 당연하겠지." 

내가 지어낸 적당한 핑계에 티아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그런 폐쇄적인 마을은 흔한 일이니 더 이상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에드도 꽤나 평온하게 살았구나 ...... 다행이네. 휴. ...... 미안해, 에드. 너무 오래 얘기해서 좀 피곤한 것 같아."

"아, 미안. 미안해, 힘든 이야기를 억지로 물어봐서..."

"그건 괜찮아. 나도 에드한테 얘기하고 싶었는데 ......, 아니, 지금 와서야 말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세상 물정에 그렇게 문외한인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아, 그래. 그거 말이야. 사실 최근에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마도구를 얻었거든. 그래서 문득 옛날이 생각나서 알렉시스 일행을 찾아봤는데 ...... 알렉시스와 곤조 아저씨는 반응이 없었고 ...... 이니까.... ........."

"그렇구나 ...... 그럼 역시 알렉시스들은 죽었구나 ......"

내 말에 티아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전이 결정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은 티아가 알렉시스나 곤조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물론 머리로는, 그리고 상식적으로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 시신 수습에 실패한 이상 결정적인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행방을 물었을 때, 다른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즉, 마침내 두 사람의 죽음이 확고부동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 미안"

"그런 표정 짓지 마. 에드도 나쁘지 않아 ...... 아니, 오히려 에드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어. 계속 인정하기 싫어서 외면했지만 ...... 역시 나는--" 

꼬르륵…… 

무언가를 말하려던 티아의 말이 큰 배꼽 소리로 끊어졌다.

순간 티아의 얼굴은 뾰족한 귀 끝까지 살짝 붉게 물들었다.

"아, 아하하하하하...... 아니야? 이거 봐요, 집 밖에서 고블린이 방귀를 뀌었나 봐! 정말이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하하하, 그렇구나. 그래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으으, 다른데 ......, 에드가 요리해준다고?"

"그래. 그때보다 요리 실력도 늘었고, 유통기한이 긴 조미료 같은 것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흔한 요리라면 대부분 할 수 있을 것 같지?" 

예전에 용사 파티로 여행을 갔을 때는 당연히 내가 요리를 담당했다. 뭐, 가끔 티아나 곤조 아저씨가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70%는 내가 만든 거다. 그리고 그 후의 이세계 여행에서도 요리 솜씨는 비교적 유용하게 쓰인다. 그래서 본업인 요리사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사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다.

"우와, 그립다...... 아, 하지만 어떡하지......"

"응? 뭐야, 이제와서 무슨 망설임이 필요해?"

"아니요. 만들어 주는 건 고마운데, 요즘 식욕이 별로 없어서 제대로 된 식사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

"어? 그렇게 큰 소리로 배를 울리더니 ...... 아파 아파!"

"으악! 에드 바보!"

테이블에서 몸을 숙인 티아의 주먹이 내 머리 위로 퍽퍽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불합리한 폭력의 비를 견디고 있자마자 티아가 뺨을 부풀리며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정말 에드! 그런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헤이헤이, 몇 년이 지나도 나는 나니까. 그래, 그래 ...... 무거운 걸 못 먹겠다면 수프나 스튜 같은 걸 먹을까? 든든한 요리는 다시 기운이 날 때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

"그 '괜찮아? 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티아가 귀찮아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갈 생각도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요리하는 것도 괜찮고, 지금 가벼운 요리를 만드는 것도 괜찮아. 아니, 내가 먼저 말했으니까 정말 사양하지 말라고."

"그래? 그렇다면 ...... 아, 맞다!" 

내 말에 티아가 표정이 반짝반짝 빛나며 얼굴 앞에서 손을 맞잡는다.

"스튜! 예전에 에드가 만들어 준 스튜가 먹고 싶을지도 몰라! 저기요, 큰 뱀을 처치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만들어 준 ......"

"아~ ...... 아, 저거였구나! 오, 좋아!"

"그래요! 그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うむ! よきにはからえー!」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하게 인사를 하는 나에게 티아가 위풍당당하게 대답하고,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흠, 속마음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장난을 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거나 ...... 일단은 괜찮을 것 같다. 이제 그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야겠지.

"음, 그럼 재료를 ......"

"아, 선반 안쪽과 뒤쪽 식료품 저장실에 있는 건 다 써도 돼요."

"알았어!" 

조리실에서 식재료를 살펴보고 있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티아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선반 속을 살폈다. 아, 버터나 밀가루는 보통 있구나. 역시나 우유는 아니었지만, 전에 산 게 있었지 ...... 응, 있었어. 나는 티아의 집 선반에 더해 허공에 열린 <방랑자의 보물창고>에 손을 집어넣고 필요한 재료를 꺼냈다. 평소에는 추방 스킬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어 피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숨길 생각이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숨길 수도 없다. 허리에 찬 가방에서 깨지기 쉬운 병에 담긴 우유를 꺼내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저기, 에드? 아까부터 에드의 손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유병이 나온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

"이봐, 티아, 무슨 소리야? 사람 손은 사라지지 않고, 우유는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잖아? 그렇게 되면 방 안이 온통 우유로 뒤덮여 여름에는 지옥이 될 거 아냐?"

"으읏! 확실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 그렇지 않아! 아무리 봐도 아까부터 에드 손이 들락날락거리고 있고, 애초에 추가 재료가 계속 나오고 있잖아! 우리 집 식료품 저장실에 고기 같은 건 없었잖아!"

"응? 그건 착각한 거 아냐? 봐봐, 꽤 좋은 고기가 잠자고 있었잖아?"

"우와, 예쁜 살코기 ...... 아니야! 속지 마! 이런 좋은 고기를 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에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돌직구를 무시하고 나는 요리에 집중한다. 추방 전에 조금 넉넉하게 구입한 재료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신선도에는 문제가 없다. 마력이 필요하고 양이 많지는 않지만, 식재료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매직 스톡이 편리하네. 저렇게 늦은 시기가 아니라 좀 더 이른 시기에 구할 수 있었다면 식량 사정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말이지. 아, 근데 연료용 마석의 마력이 좀 줄었나? 내 초라한 마력으론 도저히 충전이 안 되겠구나. 차라리 티아에게 부탁할까? 아니면 ...... 덜컹!

"GYAOOOOOOOON!"

"헉!" 

갑자기 집 밖에서 크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진 것 같은 진동이 느껴진다. 거기서 잠시 뒤늦게 울려 퍼지는 것은 고음의 짐승 울음소리.

"GYAOOOOOOOON!"

"어이쿠, 뭐야, 무슨 일이야? 엣, 티아!" 

내가 창밖을 내다보기도 전에 티아가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나도 급히 뒤를 쫓아갔더니 마당에는 새빨간 비늘로 뒤덮인 마수의 왕, 드래곤의 모습이 있었다.

"드래곤!? 왜 이런 곳에!" 

드래곤...... 그것은 모든 마수의 정점에 군림하는 최강의 종이다. 강인한 비늘과 거대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은 그것만으로도 공수 양면에서 만만치 않은데, 여기에 넘치는 마력으로 하늘을 날거나 숨을 내뱉을 수 있는 등, 그야말로 허당끼가 넘치는 존재다. 다만 그런 드래곤도 당연히 종류나 격의 차이가 있고, 눈동자에서 언어를 매개로 한 지능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눈앞에 있는 것은 화염계통의 하급종인 레서 드래곤인 것 같다.꽤 강적이지만, 용사 파티라면 쓰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적은 아니지만 ......, 그렇지 않아요!

"이봐, 티아! 왜 이런 곳에 드래곤이 있는 거야! 이 녀석들은 보통 산 위에 있는 거 아니야?" 

하위 종의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둥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레서 드래곤이 둥지를 짓는 곳은 기본적으로 산 위다. 하등종이라서 몸에서 발생하는 열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고, 기온이 낮은 곳에 있지 않으면 몸에 열이 쌓여 자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으스스한 숲 속에 있는 걸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티아에게 말을 걸었지만, 티아는 내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서두르는 듯한 표정으로 던졌다.

"에드! 왜 나왔어!"

"왜, 이런 비명소리가 들려오면--"

"GYAOOOOOOOON!"

"이야기는 나중에! 우선 이 녀석부터 해결해야지!"

"그래, 그렇겠지"

필사적인 티아의 표정과는 달리, 나는 지극히 냉정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드래곤은 강적이지만, 고대 종이나 상위 종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로서는 레서 드래곤 따위는 상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티아를 보호하듯 드래곤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허리에 찬 검을 빼고 티아를 향해 가볍게 시선을 돌린다.

"그럼 티아, 여긴 내가--"

"바람을 타고 방적하는 것은 녹색을 품은 은월의 칼날, 무딘 빛을 굳혀서 떨어뜨리는 것은 삼방육대 정령의 깃털! 모여서 입고, 헷갈려서 춤을 추라! 루나리티아의 이름으로, '트라이엣지 스트림'을 드러내라!"

"GYAOOO――――…………"

'쿵' 내가 멋들어진 대사를 내뱉기도 전에 티아가 시전하는 정령 마법이 만들어낸 바람의 칼날이 극도로 굵은 용의 목을 쉽게 베어버렸다.

"...... 어? 진짜?" 

그 위력에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잘린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흙먼지를 내뿜으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용의 곁에 다가가 확인해보니 확실히 죽어 있었다.

"하아......하아......하아......"

"우와, 한 방 먹였어! 티아, 내가 없어진 후 얼마나 강해진거야!" 

적어도 내가 알던 시절의 티어에서는 아무리 하급종이라 해도 드래곤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숨소리가 거칠어 보이지만, 그 위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정상일 것이다.

"하아......하아......하아......"

"우와, 뭐야, 이 공격은! 비늘도 뼈도 근육도 다 깔끔하게 잘려나가는데, 얼마나 날카로운데 ...... 내 추방스킬로 막을 수 있겠어?" 

후반부에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법 공격인 만큼 이론상으로는 <흡마의 책>으로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기까지 끊어지면 물리적인 힘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불패의 성벽>이 등장할 차례인데 ...... 음, 시도해보고 싶지는 않네요.

"하아......하아......하아......"

"...... 티아?"

모처럼의 기회, 모처럼의 활약이다. 일부러라도 들뜬 표정을 짓는 내 앞에서, 그러나 티아의 호흡은 언제까지나 고르지 못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자 유유히 서 있던 티아가 갑자기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우왓! 잠깐, 괜찮아............!?" 

지탱한 티아의 몸이 무서울 정도로 가볍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날씬한 편이고, 그 중에서도 티아도 그럭저럭 작은 편이긴 하지만 ...... 그래도 이건 분명히 있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이봐 티아,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하하...... 하하...... 미안해, 에드, 내가 좀 너무 격하게 했나봐. 하하......하하...... 응,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 티아가 내게서 떨어져서 제 발로 일어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고 발밑이 여전히 흔들리는 등, 어떻게 봐도 괜찮지 않다. 차라리 아직 숙취에 시달리는 중년의 모험가가 낫다 싶을 정도다.

"아니, 아니, 그것으로 괜찮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봐도 허탈이잖아."

"으음.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은 건 괜찮은 거라고! 오랜만의 전투였고, 에드 앞이라 조금 멋을 부려서 너무 기합을 넣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

"……………………"

"...... 알았어요. 그럼 식사 준비가 끝날 때까지 방에서 좀 쉬고 있을게. 그럼 괜찮겠지?"

"...... 하하. 어쩔 수 없네. 잘 쉬어야해?"

"네. 괜찮아요...." 

말없이 쳐다보는 내 시선에 티아가 삐친 듯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간다.

그 발걸음은 역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내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젠장, 나 뭐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답답함에 짜증이 나서 머리를 긁적거린다. 내가 쓰러뜨리면 티아를 저런 상태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무리하게 드래곤을 순식간에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사이가 좋지 않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

"...... 좋아, 기분 전환해서 맛있는 걸 만들어볼까. 아, 그 전에 이 녀석은 정리 좀 해야겠어." 

뺨을 톡톡 두드리며 기운을 차리고, 나는 일단 아직 피를 흘리며 눈앞에 방치된 용의 시체를 치우기로 했다. 다행히 강한 용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약한 마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겠지만, 반대로 강한 마수들만 끌려올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하위 종이지만, 레서드래곤의 몸집은 5미터 정도 된다. 죽어서도 비늘의 강인함을 잃지 않고, 보통 이런 것을 해체하고 폐기하는 데는 상당한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

"얍"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나는 드래곤의 모든 것을 <방랑자의 보물창고>에 넣어둔다. 후후후, 역시 추방 스킬은 대단하네. 청소도 쉽게 할 수 있겠지 ...... 뭐, 이대로 방치하면 안에서 썩는 게 당연하니 하루 이틀 안에 꺼내서 꾸준히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지옥을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 시체를 처리할 수 있는 곳은 나중에 티아에게 물어보자 ...... 티아, 티아가......" 

이 용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방금 전의 티아의 모습이다. 티아가 발동한 정령 마법은 확실히 강력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소모가 심상치 않았다. 일시적인 어지럼증이나 피로감은 단시간에 엄청난 마력을 소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같으며, 그 정도의 힘을 썼으니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뭔가, 뭔가 다른 느낌이 아닌가......?)

나 자신은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아까 티아의 모습에서 지울 수 없는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직감은 그 위화감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급적이면 추궁하고 싶지만, 가뜩이나 알렉시스 일행에 대해 알아내느라 지쳐 있는 데다, 본인 말로는 오랜만의 전투로 더욱 지쳐 있는 티아에게 심문하듯 추궁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럼, 여기서는 좀 더 진지하게 해볼까?"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스튜에 넣을 재료를 바꾸어 나갔다.

개인적으로는 큼지막한 고기와 야채가 잔뜩 들어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식욕이 없다면 차라리 모든 재료가 다 녹아든 진한 국물 같은 스튜가 더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것은 역시 우유다. 나는 원래 사용하려던 일반 우유를 집어넣고, 신비한 글자가 새겨진 종이로 엄격하게 봉인된 금속 캔을 꺼냈다. 그 안에는 어느 세계에서 구한 100년 사는 신성한 소의 젖이 들어 있다.

"후후후, 설마 이 녀석의 봉인을 풀 때가 올 줄이야 ...... 아까워서 평생 안 쓸 줄 알았는데..." 

분명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 녀석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티아를 응원하기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다. 그 외에도 불사조 고기 ...... 쓰러뜨리고 있으니 불사조가 아니지 않느냐는突っ込み...... 무시하고 ...... 묘하게 만병통치라는 약초라든가, 너무 귀해서 쓸 수 없었던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투입해 나간다. 뭔가 이건 불량 재고의 일괄 처분 같은 느낌이네요 ...... 아니, 하나만 있으면 성을 쌓을 수 있는 귀중품들만 있는 거죠.

"이제 끓이기만 하면 되겠네" 

그렇게 준비된 재료를 나는 주변의 공기를 압축해 단시간에 맛이 스며들게 하는 신기한 냄비에 집어넣는다. 마지막으로 각종 조미료로 간을 맞추고 천천히 푹 끓여주면 ......

"으핫!" 

완성된 하얀 스튜를 한 숟가락 떠서 한 입 베어 물면 그 진한 맛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음,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이 녀석 맛있다. 목구멍을 지나 위장에 도달한 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온몸을 따끈따끈하게 데워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녀석은 완벽해! 이봐, 티아! 완성됐어!" 

기쁜 마음에 냄비 속을 뒤적거리며 티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다.

"티아? 어이, 티아?" 

냄비를 불에서 내려놓고 침실 앞까지 가서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티아의 반응은 없었다. 혹시 이거 혹시 본격적으로 자고 있는 건가? 많이 피곤해 보였으니 이대로 눕혀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스튜 같은 건 일어나서 다시 데우면 되니까.

하지만……

"...... 티어? 들어간다?"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의 흔들리던 티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며 떠나지 않는다.

얌전히 자고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방 안에 쓰러져 있다면 ...... 그런 예감이 내 손을 움직여 대답 없는 문을 열게 한다.

"뭐야, ......이 뭐야, 그건 ......!"

"어, 뭐야! 꺄아! 에드의 저질!" 

내 눈앞에는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속옷만 입고 있는 티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티아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티아에게 다가갔다.

"잠깐, 에드! 왜 방에 들어오는 거야! 거기서 '미안해! '라고 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가는 자리잖아!"

"……………………"

화난 듯한 티아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티아의 양손을 잡고 그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결혼은커녕 연인조차도 아닌 상대에게 취하는 태도로는 최악이고, 그대로 잘려도 불평할 수 없는 폭거였지만, 그런 건 내 머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에드? 저기요, 무서워. 제발 밖으로 나가 ......"

"티아, 그 몸은 어떻게 된 거야?"

한때 동경했던 젊고 아름다운 엘프 여성. 그런 사람의 나체 앞에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부터 아래, 하얗게 빛나던 피부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고, 여기저기 칙칙한 얼룩이 있다. 뼈가 튀어나온 몸은 가늘어지고, 원래부터 가늘었을 팔과 다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티아는 아마 스무 살쯤 됐을 것이다. 300년의 수명을 가진 엘프치고는 아직 젊어야 할 티아의 몸은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처럼 보였다.

"왜, 왜 이런...... 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너무 불합리한 현실에 내 머리는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에 내가 놀라고 있을 때, 티아가 슬픈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하하...... 에드에게 알몸을 보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네." 

그렇게 말하며 웃는 티아의 말에 나는 그리운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추억에 잠길 때가 아니다.

"대답해, 티아. 이게 무슨 뜻이야?"

"알았어요. 설명할 테니 ...... 그 전에 옷 좀 갈아입게 해줄래?"

"...... 아, 그렇군요. 미안해."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사과의 말과 함께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내 손을 티아가 잡아끌어 잡아당긴다.

"티아?"

"미안해. 뭔가 이제 혼자서는 옷 갈아입기도 힘들 것 같아서 ......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

"오, 오오. 알았어"

티아의 부탁으로 나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보물을 다루는 듯한 내 손놀림에 티아가 간질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 고급스러운 핑크색 잠옷을 입혀주었다. 욕망 따위는 느낄 수도 없다.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울고 싶을 만큼의 슬픔뿐이다.

"고마워요, 에드. 그래, 모처럼이니까 침대에 누워도 되겠지?"

"아, 좋아" 

순진하게 손을 뻗는 티아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어올린다.

그 무게의 가벼움에 또다시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고 침대에 티아를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후후후, 설마 에드에게 이런 일을 당할 날이 올 줄이야. 우리 엘프에겐 10년이란 세월이 정말 짧게 느껴지지만, 인간은 금방 커져 버리잖아."

"하하하, 그렇네"

이렇게 보면 티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까 왜 굳이 알렉시스 일행과 함께 여행할 때 입었던 옷을 입었나 싶었는데, 어쩌면 신체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옷이 저 옷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런 것을 보여줬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티아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지? 짐꾼에게 도망쳐서 알렉시스 일행과 필사적으로 싸웠다고요."

"...... 아" 

비록 억지이긴 하지만 한 번 웃음을 되찾은 미소가 흐려지는 것을 보고 나는 자연스레 낮은 목소리를 낸다. 그런 나에게 티아는 왜 그런지 웃음을 터뜨리며 표정을 조금 밝게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 때, 나는 정령 마법의 오의를 사용했어. 엘프들 사이에서만 전해지고, 엘프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평소에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잘못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그 힘으로 나는 알렉시스 일행과 싸웠어 ......"

"...... 즉, 그 대가가 그 몸이라는 뜻인가?"

"그런 것"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 힘의 대가는 압도적으로 무겁다.

알렉시스 일행과 싸운 게 5년 전이었을 텐데, 그 이후로 계속 이런 몸으로 ...... 응?

"어라? 근데 티아, 아까는 그냥 혼자 일어나서 혼자서 잘 일어났잖아? 그런데 지금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옷 갈아입는 것조차도 못한다고.............................어, 거짓말이야, 설마!"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고,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티아를 바라보았다. 아까 티아는 갑자기 나타난 용을 강력한 마법으로 처치해버렸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몸 상태가 나빠져 혼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즉 ......

"아하하하 ...... 들켰어? 그래, 방금 전에도 그걸로 정령 마법을 강화했어."

"장난치지마! 아니, 그게 뭐야! 도대체 무슨 대가를 지불한 거야!"

"음, 꼭 말해야 하는 거야? 이건 그냥 엘프들만의 비밀이야 ......"

"……………………"

말문이 막히는 티아, 그러나 나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자 티아가 지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이 흘러나온다.

"훗...... 지불한 대가는 바로 수명이야. 내 목숨을 마력에 섞어 정령 마법의 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거지."

"ㅡ...... 그것, 쓰면 회복은 ......"

"안 돼요, 생명이니까. 그래서 선천적으로 수명이 긴 엘프들만 사용할 수 있어. 보통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해서 이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될 즈음에는 섞을 수 있을 만큼의 생명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래, ............" 

예상대로 최악의 대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티아가 눈앞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벽에 주먹을 세게 휘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왜, 왜............"

"어쩔 수 없잖아. 안 쓰고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깎아서라도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생각도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티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5년 전에도 그랬을 거다!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수명을 단축해도 좋다는 건 나라도 알 수 있다. 그게 아니라 ...... 아까! 왜 방금 전에 드래곤 정도에 그런 힘을 썼어!" 

도망갈 곳 없는 전장에서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이라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는 달랐다.하찮은 용 한 마리 따위는 상관없어--!

"?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에드도 위험했을 텐데......."

"......하? 나?"

"그래요. 집 안에 있으면 상관없지만, 에드만 밖으로 나와 버리니까. 한 방에 쓰러뜨리지 않으면 에드도 죽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어요."

"죽는다고? 내가?"

"그래? 물론 에드도 10년이면 조금은 강해지겠지만, 설마 용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해지진 않았겠죠?"

"아, 아아 ...... 아아아 ........................"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아에게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 그래.

확실히 그렇다.

그 당시 내가 평범하게 이 세상에서 10년을 살았다면, 확실히 드래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죽을 각오로 수련을 계속하면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내 몸은 '하얀 세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혀 단련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나를 보고 '용을 이길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미안"

"왜 사과하는 거야? 내가 에드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에드에게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아니다. 아니야 ......" 

피를 토하듯 내뱉는 나의 사과에 티아는 오히려 수고했다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저런 용,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집 앞에 착륙조차 시키지 않았을 거야.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야! 여유는커녕 적당히 일만 하다 보니 티아도, 드래곤도, 중요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짓눌릴 것 같은 후회가 내 눈에서 흘러나온다.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 주먹은 이제 아다만트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다. 

한심하다, 한심하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런데 ...... 그런 내 얼굴을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티아가 안아준다.

"맙소사, 그런 표정 짓지 말아! 괜찮아. 이렇게 늦게라도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사이, 맞는 ......?"

"그래.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에드와의 재회를 할 수 있었어요."

"읏…………"

티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부드럽게 속삭인다. 가냘픈 심장의 박동에 울 것 같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알아요. 이제 곧 갈 때가 됐다는 걸. 이제 곧 알렉시스네 집에 갈 거라는 걸. 그 자체는 두렵지 않아.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죽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있었다. 만약 알렉시스 일행이 살아서 지금도 내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면 ...... 그렇게 생각하면 얌전히 죽을 수도 없고, 이 잠옷으로 마력을 몸 주위에 고정시켜서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어."

"그래요 ......, 그 잠옷을 입고 있으면 ......?" 

나는 티아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코가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있는 티아의 얼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래도 이제 무리예요. 그 싸움으로 현상 유지를 위한 마력조차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에드 덕분에 알렉시스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 마왕의 성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마지막으로 에드와의 대화도 할 수 있었으니까 ...... 이제 더 이상 아쉬울 게 없어 ......"

"그런 말 하지마! 우리 이제 막 재회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떼쓰는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나에게 티아의 손이 부드럽게 내 뺨을 쓰다듬어 준다.

"후훗. 에드 마음대로라면 들어주고 싶지만, 이 정도면........." 

도도도즈운!!!! 

티아의 말을 가로막는 듯 집 밖에서 또다시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충격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잠깐만!"

"티아! 왜?"

"나도 갈래"

"하! 무슨 소리야, 티아는 여기서 쉬고--"

"데려가"

티아의 손가락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다. 큰 힘이 들어 있지 않을 것 같은 손가락을, 그러나 나는 뿌리칠 수가 없다.

"제발. 혼자 남겨지는 것은 ...... 싫어"

"...... 알았어"

그 어떤 보석보다 부드럽게 티아를 안아 올리면 나는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올려다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금속 거인이었다. 그 위엄에 티아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런, 아다만트 골렘 ......!?"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 아다만트.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그 흑자색의 빛은 단순히 딱딱하고 무겁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여지가 없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것이 왜곡된 인간형이라면 아까의 용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때려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갱도의 마력 웅덩이도 아니고, 천연 골렘이라니! 아까의 용이라던데, 왜 이런 게 있는 거야!"

"미안해, 에드, 내 탓일지도 몰라" 

연달아 들이닥친 불합리함에 내가 무심코 소리를 지르자, 왠지 모르게 팔짱을 끼고 있는 티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집 주변에도 마력을 모으는 마법진을 깔아 놓았어요. 아까의 용은 거기에 이끌려 온 것 같고, 이 골렘은 ...... 어쩌면 그 영향으로 탄생한 것일지도 모르죠."

"아니, 아니야, 이상하지 않아? 이런 게 다가오면 오래 살기는커녕 일상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잖아!"

"그 부분은 잠만 자고 있으면 괜찮았는데 ...... 오늘 에드씨가 와서 잠옷을 벗어버렸잖아요. 거기서 더 이상 소모되지 않는 마력이 새어나온 것 같아요."

"아, 그런 ......" 

그렇구나, 불청객 ...... 즉, 나 때문에 또 다른 방해꾼을 불러들였다는 뜻이구나. 내가 얼마나 역병신이냐 ...... 솔직히 좀 움츠러들지 않겠어?

"미안해, 미안해 에드. 에드 만나서 반가워서 이런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줄이야 ...... 괜찮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에드만..."

"하하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티아?"

비장한 표정을 짓는 티아에게, 그러나 나는 웃는다. 아, 그렇군요. 나 때문이라고? 그럼 책임지면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 정도 적, 별거 아니야" 

아까는 몰랐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알고 있다면 ...... 이런 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드! 난 이제 됐어! 그러니 무모하게 굴지 마!"

"무모하지 않아"

나는 티아를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섰다. 그런 내 등 뒤로 티아가 말을 걸었지만,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는다.

"말해도 믿기지 않겠지? 그러니 거기서 지켜봐줘. 이게 내가 쌓아온 시간 ...... 티아와 헤어지고 나서 얻은 내 힘이다. 자, 이리 오너라, 철밥통아! 내가 이 손으로 너를 이 세상에서 추방해버릴 거야!" 

고오오오오오! 

겁 없이 웃고 있는 내 몸에 티아의 집 지붕보다 더 높은 금속 거인이 주먹을 내리친다. 그 압도적인 힘은 땅에 거대한 구멍을 뚫고, 그 중심에 있으면 아무리 용이라도 한 방에 쓰러질 것 같지만 ......

"무슨 일이야? 네놈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가?" 

구멍의 중심, 몸을 반쯤 땅에 파묻히면서도 나는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다. 준비도 없이 그저 무거운 일격은 <불패의 성벽> 앞에서는 바람을 일으키는 장치와 같은 것이다.

"계속 받는 건 너무 멍청한 짓이지 않나 ...... 요." 

고오오오오오! 

구멍에서 기어 나온 나에게 다시 한번 골렘의 바람을 가르는 거대한 주먹이 터진다. 하지만 이번엔 무사하기는커녕 내 몸을 작게 흔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는 더 큰 덩치에서 날아오는 주먹의 폭격을 나는 냉정한 얼굴로 계속 받아낸다.

"이런 꼬맹이를 날려버릴 수 없는 게 신기해? 그럼 한 가지 더 추가해 줄게!" 

커다란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피하고 나는 골렘의 품에 안겼다. 그대로 내가 때리자, 아다만트 골렘의 거대한 몸통이 굉음을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하하! 내가 넘어지는 기분은 어때?" 

이것이 바로 추방 스킬 <원환반향>이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축적해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카운터 계열의 스킬이다. 이 스킬을 발동하면 아까처럼 충격 자체를 무효화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어용으로도 쓸 수 있다. 

쿠오오오오오오…………

"어이쿠, 돌이 깨어났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잠을 자고 있을 법한 골렘이 금속이 부딪히는 독특한 소리를 내며 일어선다. 상당한 충격으로 발로 찼을 텐데, 그 몸통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움푹 패인 자국만 남아있다.

"딱딱한 것일수록 타격이 잘 통하는 것이 기본인데, 역시 맨손으로는 안 되겠구나. 뭐,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격투가가 아니다. 상대가 평범한 생물이라면 모를까, 금속 덩어리인 골렘에게는 유효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때린 것은 혹시라도 뒤쪽의 티어에게 공격이 들어가지 않도록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골렘이 일어나는 동작을 취하는 동안 나는 <방랑자의 보물창고>에서 백은으로 빛나는 검의 손잡이를 꺼냈다. 그래, 칼자루뿐이다. 모든 것을 베어버릴 최강의 칼날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들어내겠다!

"가자 친구야! 혈도련성!" 

굳이 필요 없는 기술명을 '기합이 들어가니까'라는 이유로 외치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쥔 왼손을 얼굴 높이로 들고 오른손에 든 검의 손잡이를 왼손의 손목에 내리쳤다. 그러면 내 손목에 칼자루 끝이 꽂히고, 거기서 내 피가 칼자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검을 세우면 검자루에서 새빨간 칼날이 빠르게 뻗어나간다. 대장장이의 달인으로서 모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추방 스킬 <모방의 숙련공>으로, 칼자루 속의 내 피를 칼날로 연성시킨 것이다. 참고로 이 칼자루 역시 <모방의 숙련공>으로 만든 걸작이다. 이 칼자루를 통해 나의 피는 최강의 무기가 된다! 

쿠오오오오오오…………!

"어이쿠, 이제 낮잠은 끝났구나. 그럼 그쪽도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니까, 이제 결판을 내자." 

완전히 일어선 아다만트 골렘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노도, 기발함도 없이 아까의 움직임과 똑같다. 뭐야, 멍청한 짓을 한 건가? 뭐, 이 정도로 몸이 강하다면 복잡한 생각을 품는 것보다 단순하게 때리는 게 더 강할지도 모르겠지만 ...... 그것이 통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훗!"

짧고 강하게 숨을 내쉬며 나는 검을 곧게 휘두른다. 그 기세로 피가 묻은 칼집은 날아가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얇은 칼날이 뽑혀 나온다. 빛조차도 투과해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너무 약해서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가만히 놔둬도 순식간에 자멸해 버릴 것 같지만, 그 얇음으로 인해 만물의 틈새로 들어가 그 모든 것을 베어 버린다......! 자, 봐라!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다! 단순한 피의 칼날을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박살의 검」으로 승화시키는 추방 스킬〈모방 숙련공〉과 100년 동안 이계를 넘나들며 갈고 닦은 검의 실력! 이 두 가지가 합쳐진다면--........

"만상일체, 거절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즈즈즈즈우우우웅!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아다만트 골렘의 거대한 몸통이 두 동강이 나 쓰러졌다. 웅장한 땅의 울림과 흙먼지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렸다가 적이 확실히 죽었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 번 칼자루만 남은 '천수의 검'을 휘둘러 <방황하는 자의 보물창고>로 되돌려 놓았다. 참고로, 자르는 동시에 칼날은 붕괴되기 때문에 칼자루를 휘두르는 의미는 특별히 없다. 뭐, 그 부분은 양식미라는 거다. 실제로 멋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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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끝났어 티아"

"……………………"

"티아?"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티아에게 나는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그 눈이 동그랗게 뜨이면서 드디어 대답이 돌아온다.

"에드 ...... 에드, 이렇게 강했었어 ......!?"

"글쎄요. 아, 미리 말하지만 예전부터 강했던 건 아니야.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한 후 다시 한 번 단련한 거야."

"그래, 그렇구나 ............ 이봐, 에드?"

"응? 뭐야?"

"그렇게 강하다면 혹시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그게 제일 궁금한 거잖아.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 뭐, 그래도 마왕을 쓰러뜨려라, 뭐 그런 요구는 못하겠지만..." 

100번의 이세계 여행으로 상당히 강해졌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왕과 대면한 적이 없다. 뭐, 그런 곳까지 동행하면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리고 나는 내가 무적이라고 자만할 생각도 없어. 검술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지만, 그 외의 내 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추방 스킬이다. 쉬운 ......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받은 힘 따위는 언제 어디서 사라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쪽의 잡어라면 몰라도 마왕 같은 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상대와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불확실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런 상대와 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앞으로 티아가 여유롭게 여생을 보내는 데 마왕이 방해가 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

"............ 나를 마계 너머로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어"

'마계의 저편? 그것은 ......"

"응. 알렉시스 일행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 ...... 그곳에 가고 싶어요."

"……………………" 

결심한 티아의 부탁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곳에 가서 뭘 하려고?"라고 묻고 싶다. 라고 묻고 싶지만, 그 대답은 영원히 듣고 싶지 않다.

"어때요? 아,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거절해도 돼요?"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

"그럼 ...... 아, 의뢰할 거면 제대로 보상도 해줘야지. "음, ...... 그래,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파자마 같은 건 어때? 이건 꽤 고급품이라 팔면 금화 20냥 정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필요 없어! 아니,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마력을 자동으로 수렴하여 생명 유지에 사용할 수 있다면, 티아의 잠옷은 분명 돈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동료 ...... 더군다나 여자의 갓 벗은 옷을 받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팔면 되겠지만, 사실상 유품 같은 걸 팔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방황하는 자의 보물창고>에 계속 보관해 두는 것도 좀 그렇고 ...... 그래, 상상의 단계에서도 남는 물건은 정말 필요 없다.

"으아, 끔찍하네! 지금 내 유일한 재산이 ...... 인데, 안 돼요?" 

촉촉한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시며, 티아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 표정을 짓는 순간,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다.

"……………………하아아아아아아. 알았어."

잠시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내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티아의 앞날을 생각하면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단, 내 말은 꼭 들어야 해, 알았지?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중간에라도 되돌아갈 테니까?"

"그래! 고마워요, 에드!"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티아가 말했다. 하지만 더는 그대로 일어나서 나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방랑자의 보물창고>의 내용물과 대조해본다.

(만일의 경우를 가정해도 물도 식량도 충분하네. 그럼 당장 떠날 수 있겠지만 ......)

"이봐, 티아, 하룻밤 자고 나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 바로 나가는 게 좋을까?"

"음, 그럼 지금 당장, 지금?"

"…………알았어"

왜 그쪽을 선택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티아에게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티아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럼 빨리 갈까요? "그럼 빨리 갈까요, 아가씨, 등에 태워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아, 지금이라면 엉덩이를 조금만 만져도 괜찮아?"

"건드리지 마! 바보같이 말하지 말고 이걸 타라!"

"네~" 

내가 <방랑자의 보물창고>에서 꺼낸 등짐에 티아가 올라타면 끈으로 단단히 고정한 후 다시 내가 짊어진다. 어디선가 병자를 옮길 때 썼던 건데, 설마 다시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가볼까?"

"응"

내 말에 대답한 티아가 문득 자신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다녀오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도 오늘까지 티아를 지켜준 집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일직선으로 마계로 달려갔다.

"와우, 편하다!"

"하하, 그거 좋은데?" 

사악한 마수가 들끓는 마경을 나는 티아를 짊어지고 달린다. 낮에도 위험한 이곳을 밤에 달리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지금 나에게 정말 위협적인 것은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마수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출 수조차 없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다.

"비켜, 비켜!"

"갸웅!?"

진행 방향에 있던 마수의 코끝을 나는 평범한 검으로 가볍게 베어버린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마수가 나를 노려보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와, 엄청 노려보고 있네"

"뭐, 저쪽에서 보면 갑자기 잘려서 다음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거니까." 

등받이에 고정되어 있는 관계로 티아의 얼굴이 나와 반대쪽을 향하고 있고, 그 때문에 지나갈 때 원한이 서린 마수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묘하게 동정하는 듯한 그 말에, 그러나 나는 웃으면서도 발을 계속 움직인다. 전투는 필요 최소한. 어쨌든 계속 전진하기 위해 통행에 방해가 되는 마수에게만 일격을 가하고 이탈을 반복하며 나아가는데, 불현듯 티아가 불쑥 목소리를 내뱉었다.

"왠지 기분이 묘하다. 예전에 왔을 때만 해도 밤의 마계는 짓눌릴 것 같은 중압감을 견디며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곳인데 ...... 이렇게 당당하게 뛰어다닐 수 있을 줄이야. 하하, 에드는 정말 대단해졌구나."

"후후후, 뭐야"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불명의 거울면>은 사용할 수 없다 ......, 아니 그건 나 자신과 소지품에만 효과가 있기 때문에 티아를 짊어지고 있으면 애초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 하더라도, 추방 스킬 <추풍의 다리>의 이동 속도는 압도적이다. 뭐,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밤의 숲을 이런 속도로 이동하면 보통은 길을 잃기 마련인데, 거기엔 역시 추방 스킬인 <실종자의 나침반>이 있다. 그것을 손에 들고 방향을 확인하면서 이동하면 목적지를 잃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항상 최단거리로 고속 이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

"야, 티아. 마계는 넓지 않아?"

"뭐야, 갑자기? 그거 넓잖아. 그래서 우리도 빠져나오는 데 엄청 고생했고, 나라 군대가 아니라 용사 파티가 마왕성을 공격하는 거잖아요."

"...... 그래, 그렇구나" 

처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실제 달리는 마경은 열 배는 더 넓은 것 같다. 아무리 이동해도 <여행의 발자국>에 표시되는 것이 숲뿐인 것이 그 증거다. 그래, 확실히 이곳을 군대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어떻게 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 숲을 깎아 길을 만들고, 예산을 물 쓰듯 쏟아 부어 수백 년을 계획하고 있겠지. 그리고 소수 정예의 용사 파티라 해도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마주치는 마수들의 강도를 감안하면 전투직이 짐을 든다는 것은 논외로 치고, 전업 짐꾼이 없으면 절반은커녕 30%도 못 갈 것 같다.

"……………………"

"문득 내 머릿속에는 도망쳤다는 짐꾼이 떠올랐다. 이곳을 돌파했다고 하면 그 녀석도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아마 나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알렉시스 일행과 함께 여행을 하고, 고생을 거듭하며 신뢰를 쌓고, 마침내 마경을 뚫고 ...... 그 정도의 경험이 있더라도 사람은 마음이 상하면 동료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겠지? 있을까?

"헷"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다. 내 목적을 위해 언제나 동료를 버리고, 버림받은 내가 남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 무슨 일이야, 에드?"

"응? 아, 그 티아들을 버리고 도망간 짐꾼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그 사람? 음, 어떻게 된 걸까? 저는 금방 이쪽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 아마 잡혀갔을지도 몰라요. 에드처럼 나름대로 함께 여행을 했으니까 얼굴과 이름은 다 알고 있잖아요."

"아, 그렇구나"

대국인 노틀랜드의 왕이 진실을 알고 있는 이상, 용사이자 자신의 아들을 버린 상대를 놓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용사 일행의 소지품으로는 제대로 환전도 못 할 테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다 결국 ...... 하는 식이겠지.

"아, 봐요, 에드! 아마 곧 마법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한 마음을 꾹꾹 씹어 삼키고 있자, 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꿈틀거린다.

"왜 뒤돌아보는데 그런 걸 알 수 있겠어?"

"저기요, 나무 뿌리가 튀어나온 부분이라든가 그런 거요."

"그런 걸로 알 수 있다니! 엘프 대단한데" 

나무의 밀도나 식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뿌리의 돌출 정도 같은 건 나로서는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계속 진행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의 밀도가 낮아지고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져나왔 ............"

밤을 새워가며 달리는 것, 대략 10시간 정도. 마침내 내 눈앞에서 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펼쳐진 것은 광활한 초원이었다.

"여기가 좋을 텐데 ...... 티아?"

"............ 내려줘"

"아아.."

등받이에서 내려놓자, 티아는 제 발로 제대로 일어서서 어슬렁거리며 초원을 걷는다. 확인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근처에 있던 내 허리 정도 높이의 바위 쪽으로 다가온다.

"여기 ...... 여기야. 여기서 알렉시스가 나에게 전이 결정을 주었어."

"그럼 ......"

"응 ............ 돌아왔다. 얘들아, 나 드디어 돌아왔어 ........................"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목소리를 떨면서 티아는 바위에 몸을 맡긴다. 동료를 버리고 강제 전이된 곳에 그녀는 이제야 겨우 도착한 것이다.

"알렉시스, 곤조 ...... 알겠어? 우리가 쫓아낸 에드, 우리가 쫓아낸 에드, 그 에드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에드, 정말 엄청나게 강해졌어. 지금이라면 알렉시스도 질지도 몰라 ...... 후훗........" 

그대로 몸을 돌리니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있는 티아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낚여 나도 고개를 들자,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붉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이봐요, 에드. 기억나니? 내가 ...... 우리가 당신을 추방했을 때를..."

"그건 기억하고 있어. 그런 심한 비난을 받으면 어떡해~" 

티아의 말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용사 파티에서 쫓겨난 계기는 티아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본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티아에게 불려서 천막으로 갔는데, 왠일인지 티아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연히 알렉시스 일행이 달려왔고, 거기서 티아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두 사람에게 강력히 항의한 결과, 나는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했다.

"...... 그때 나는 계속 생각했어요. 앞으로 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전투가 치열해지면 우리로서는 더 이상 에드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요. 그래서 쫓아냈어요. 일부러 옷 갈아입는 걸 엿보게 하고 알렉시스에게 호소했죠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에드도 죽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상하죠? 에드만 없으면 다른 짐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그 사람 역시 에드처럼 보호하면서 싸워야 할 텐데 ...... 왜 그랬을까요? 에드에게 그렇게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봐요 ...... 뭐, 뭐라 되돌릴 수는 없지만" 

티아의 말에 나는 미묘하게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당시 나는 그런 걱정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나약했고, 여행 후반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추방당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요. 내가 지켜주던 에드도 나를 지켜줄 만큼 강해졌어요. 만약 내가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 이 광경을 우리 모두 함께 볼 수 있었을까? 마왕을 물리치고 평화로워진 세상에서, 모두 함께 ......"

"아니, 그건--" 

아니야. 내 힘은 세상을 추방당할 때마다 받은 추방 스킬과 항상 젊은 몸으로 100년 동안 노력하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추방당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한 내가 지금의 나를 따라갈 수는 없다.

"에드"

"...... 뭐야"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미안해. 우리는 또 너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서."

"……………………"

"나를 ...... 내 영혼을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 최고의 짐꾼이었어요 ............---- --」--" 

마지막으로 작은 미소를 지으며 티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대조적으로 그 눈꺼풀이 닫히면 그것이 바로 이 세계에서의 나의 모험의 진정한 끝이다. 내가 추방된 후, 알 수 없었던 종말의 이야기.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옛 동료에 대한 의리는 지켰으니, 이제 열쇠를 이용해 저 '하얀 세계'로 돌아가서, 거기서 더 나아가 내 세계로 ......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십 년 만의 재회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까? 저쪽의 시간은 흐르지 않은 것 같으니, 그 곳에서 가져와서 ...... 기껏해야 몇 십 분? 뭐 잊어버린 거 아니냐고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추방 스킬은 저쪽에 돌아가서도 쓸 수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는 돈도 얼마든지 벌 수 있겠지. 아버지께는 멋진 활을, 어머니께는 옷이라도 사드릴까? 멍청한 타르호도 돈 냄새를 맡을 테니 맛있는 술 한 잔 사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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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지금 내가 돌아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한 마수를 쓰러뜨려 이름을 알리면 기사로서 사관이 아니라 귀족이 될 수도 있다. 추방 스킬이 있으면 영지 경영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남자의 꿈인 일국일성의 주인이 될 수도 있을 거야. ............

"하하...... 아, 하나님, 이것도 당신의 계산에 의한 것인가요? 이렇게 될 거라고 예측하고 저런 스킬을 주신 건가요?" 한때는 황금빛으로 빛나던 꿈들.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것들은 하나같이 놋쇠보다 더 빛바래고 허접하다. 그렇게 된 것은 더 원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뭐, 괜찮아, 태워줄게. 당신 손바닥 위에 구멍이 날 때까지 춤을 추어 줄 테니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티아의 손을 잡고, 나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든다. 그렇게 내가 사용하는 것은 100번째 세계를 추방당해 얻은 마지막 추방 스킬이다. 하늘에 있는 근원적인 힘에 의사를 전달하고, 그 형태까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 어떤 소원이라도 대체로 들어준다는 그 스킬의 이름은--........

"다 가져가라! <단 한번의 청구권>!" 

하늘 높이 치켜든 오른 주먹에서 눈부신 빛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구름을 뚫고 세상을 넘어 왠지 모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와의 연결을 느끼는 순간,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응?"

내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새하얀 세상. 그 광경에 익숙할 리가 없는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본다.。

"어! 어, 뭐야! 뭐야 여기! 아, 오, 우에!" 분명 수상한 행동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에는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그저 새하얗고, 아니 위도 아래도 모두 새하얗다. 간신히 천장이 다른 곳보다 약간 밝은 것과 발밑에 단단하고 딱딱한 느낌이 있는 것으로 내가 바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꽤나 공포에 질려 그 주변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정말 여긴 뭐야?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자다가 납치된 건가? 아니면 설마 내가 죽어서 ......!?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이럴 때는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일단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자." 

넘쳐흐르는 동요를 억지로 억누르며 나는 이곳에 오기 직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오늘 나의 임무는 밭을 망치는 해충인 발톱 두더지를 퇴치하는 일이었다. 오전에 무사히 일을 끝내고 조금 이른 점심을 먹은 후 근처 숲으로 들어가 둥지를 부수기 위해 들어갔다. 그리고 ........................

"거기까지, 그렇구나" 

숲에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즉, 그곳에서 어떤 문제에 휘말린 결과가 이 하얀 공간일 텐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원인은커녕 단서조차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설마 전이트랩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고대 유적지라면 몰라도,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 평범한 숲이잖아?" 

일단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특별히 아프지는 않다.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도 고프지 않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당분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 뭐, 그 외에는 문제만 존재하는 셈이다.

"어,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무언가를 찾는다거나 어디를 간다거나 하는 당연한 선택지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일단 걸을 수는 있지만, 이곳을 걸어서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걷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 같다.

" 실례합니다! 누구 없나요~?"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오면 일단 소리를 질러본다. 그 결과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뭔가 반응만 해준다면 이쪽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 실례합니다! 뭔가 알아차리고 보니 여기 있었어요~" 

쿵!

"우와! 이게 뭐야?" 

큰 소리로 부르는 내 뒤에서 갑자기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니 눈앞에 하얀색 테이블이 나타났다.

"어? 거짓말이잖아! 아까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 

너무 황당해서 나는 무심결에突っ込み(충격)을 넣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앞에서 하얀 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탁자 위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래, 그런 느낌이야? 뭐야 오이......" 

여기까지 오니, 이건 실수로 덫을 밟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에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음, 정말 좋지 않은 흐름이지만 ......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것이 더 좋지 않다.

"...... 글쎄, 읽어볼 수밖에 없겠지?" 

만약 이것이 길가에 떨어진 것이라면 읽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알 수 없는 곳에 사실상 갇혀버린? 라는 느낌이 든다면,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혹은 내용물이 텅 비어있다면

"장난치지 마!" '라고 소리 지르며 바닥에 내리치는 방법도 있지만 ......

"오오, 여기만 평범하네" 

펼쳐진 책 페이지에는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씨가 검은색 잉크로 적혀 있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원래의 세계에서 '추방'된 모양이다. 다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추방했는지는 전혀 적혀있지 않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여기에서 연결된 100개의 이세계로 이동해 각 세계의 용사 파티에 가입하고, 일정 조건을 충족한 후 '추방'을 풀면 된다고 적혀있었다.......?

"어, 뭐야, 이건 좀 이상해"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정도로 의미 없는 내용에 나는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하지만 쓰여진 내용은 당연히 똑같고,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이 의미불명의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로 의미를 모르겠다. 아니, 아니 왜 나는 원래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거야? 그저 잡다한 용병이 발톱 두더지를 퇴치하는 것이 세상에서 쫓겨나는 일인가? 아니면 날 여기로 보낸 게 발톱 두더지의 신이라고 한다면 ...... 아니겠지? 매일 얼마나 많은 발톱 두더지를 퇴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냐, 발톱 두더지.

"하하............, 이번엔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한숨을 쉬고 잠시 시선이 뚝 끊긴 사이, 이번에는 새하얀 벽이 갑자기 나타났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정도 되는 그 벽에는 문이 달려 있고, 거기에는 '〇〇一'이라고 쓰여진 판이 걸려 있다.

"벽에, 문 ......?" 

옆으로 돌아보면 벽의 두께는 10센티미터 정도. 어떻게 생각해도 그대로 쓰러질 것 같지만, 가볍게 손을 얹고 힘을 주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뒷면은 일반 벽면으로 되어 있고, 문이 없다. 즉, 정면의 문을 열면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이 벽이라는 뜻이다 ......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 이제야 알았네" 

이런 불가사의한 공간에서 이제 와서 평범함을 이야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얼른 가서 할 일을 끝내자 ...... 라고 생각하던 찰나, 나는 아까 책에 적혀있던 글의 내용을 떠올리며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또다시 낯선 수정 구슬이 등장하고 있었다.

"저걸 만지면 앞으로의 이세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건가?" 

여기까지 오니 드디어 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건에, 그래서 오히려 불안해진다. 그 힘이라는 것을 받으면 이번에는 어떤 대가를 요구할 것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또한 받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잡다한 용병일 뿐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세계에서 생활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용사 파티에 가입하는 것은 특별한 힘 없이는 어떻게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으음, 적어도 아프지 않아야지, 뭐 ............ 오?" 

두려움에 떨며 수정 구슬에 손을 얹자, 그곳에 깃든 희미한 빛이 닿은 손을 통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열병에 걸린 듯 머리가 멍해지고,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방금 얻은 힘의 이름과 사용법이 떠올랐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발동되어 용사를 만나고 동료가 되기 위해 필요한 해프닝을 만나게 해주는 능력 ...... <우연이라는 필연>이네요. 이건 확실히 유용하네." 

세상에 선택받아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용사라고 하는데, 그런 대단한 인물이라면 동료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동료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힘은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해 준다고 한다. 물론 용사 파티에 가입한 뒤에는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가장 어려운 걸 해결해 준다고 하면 확실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뭐야, 좋은 걸 주는 거 아니야! 잠깐만 다시 한번 ...... 아니, 아니야, 아니야!" 

이건 저거다. 극악무도한 도적이 비에 젖은 새끼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뭐야, 이 녀석, 뿌리는 착한 놈이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거다. 속지마, 나, 이런 곳에 사람을 납치하는 걸로 봐서는 괜찮은 상대가 아니야 ...... 아니, 사실은 나를 납치한 것과 이 힘을 주는 상대는 별개고, 이쪽은 순수하게 나를 도와주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라는 거지?

"일단 이 힘에 관해서만 믿어도 될 것 같은데 ...... 응?" 그러자 나는 수정 구슬 속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아직 희미한 빛이 남아 있다.

"호오? 그렇구나, 그런 것도 있구나. 그럼 이걸 알아챈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추가 보상은 뭐야 ...... 가!" 

남은 힘도 받아두자고 생각한 순간,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이 내 안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크아아아악!?"

아프다! 아프다! 뜨겁다! 고통스럽다! 피가 타는 것 같은 열이 온몸을 휘감고, 머리가 속이 터질 듯이 아프다! 그 고통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

짐승 같은 비명소리. 지성과 이성을 잃고 고통으로만 가득 찬 나는 하얀 땅 위를 애벌레처럼 굴러다닌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정신은 그러나 광기가 되어 돌아왔고, 너무 강한 고통은 의식을 잃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앗...... 콱...... 쿠핫............"

찢어진 목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은 왜 터지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이고, 내 의지로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제멋대로 휘청거린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끝이 없는 고통. 그에 맞춰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은 평범한 잡용병으로 20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내가 경험하지 못했을, 그러나 분명 내가 살아온 20년 이상의 기억의 무리.

"읏.........아.............."

낯선 세상에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하고 ...... 그리고 그 사람에게 쫓겨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걸 하나하나 반복할 때마다 내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고, 동시에 내가 모르는 힘이 점점 커져간다. 세 개, 네 개, 열 개, 스무 개, 스무 개...... ...... 돌아본 세상은 점점 더 많아지고, 고통은 커지고 영혼은 비명을 지른다. 오십을 넘기고 칠십을 넘기고 ...... 인내의 한계 따위는 이미 넘어섰지만, 그래도 나는 힘의 격류를 계속 받아들인다.

"큿, 웃! 우우우우우우.................!!!"

왜? 왜 나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이를 악물고,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왜 이런 ......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견뎌내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지금 당장 던져버리고 싶은데 ...... 가장 먼저 내 안에 들어온 기억이 내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만난 적도 없는 미소녀를 시중드는 '좋은 신분'의 내가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외치는 것이다. '포기하지 마라. 그러면 과거도 바꿀 수 있어'

"젠......장........ 크아아아아아악.......!"

온 세상에 울려 퍼지라는 듯이 나는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내 영혼은 타버리고 ...... 그곳에 내가 돌아왔다.

"하아..하아...하아....헤헤헤......................."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내 몸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한번의 청구권>을 잃는 대가로 얻은 새로운 추방 스킬의 이름. <두 번째 축원> ...... 그것은 미래의 나로부터 모든 기억과 능력을 물려받을 수 있는, 신조차도 속일 수 있는 최고의 추방 스킬이다. 본래 다칠 수 없는 이 공간에서 피를 토해낼 정도로 규격 외의 괴상한 기술이며, 설마 이걸 한 번 더 하면 원래의 내 영혼이 완벽하게 산산조각나서 그냥 죽어버릴 것 같다는, 아니 이번에도 꽤나 위험했을 텐데... ...

"...... 내기는 내가 이겼어"

그래도 나는 해냈다.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를 내가 원하는 미래로 바꾸기 위해!

"스읍.......하아........좋아"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나는 힘차게 일어섰다. 그토록 엉망이 되었던 몸도 내가 이 '하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정말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사양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 보면 감사할 따름이다. 어차피 여기선 추방 스킬을 사용할 수 없으니 부상을 치료할 수도 없으니까.

"……………………"

이곳의 바닥에는 먼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빵빵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기분 전환을 한다. 그러고 나서 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토록 길었던 벽은 이제 문 하나만 남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아직 열리지 않은 '〇〇一'의 문 ...... 티어들이 있는 세계. 아까의 느낌으로 미루어 볼 때, 어떻게 생각해도 세 번째는 없다. 즉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재시작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번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따뜻한 조건이 생기면, 아마 나는 평생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최고는 언제나 이상의 끝이고, 포기는 타협으로 영원히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없을 기적이 일어났다. 울어도 웃어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말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겠죠?" 

지금의 나라면 분명 할 수 있다. 그 똥 같은 결말을 바보같이 웃으며 다 같이 건배하는 미래로 바꿀 수 있다.

"자, 두 번째 바퀴의 시작이다! 최강의 힘으로 무쌍해서 ...... 멋지게 추방당해 주마!"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